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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Nov 17. 2015

화요일의 작은 이야기

작은 학교에서 나눈, 작은 작가의 꿈 이야기

11월 10일, 지난주 화요일.

저는 브런치에서 만난 인연으로 작은 재능 나누기를 하고 왔습니다.


1. 눌산님과의 만남


방송작가 시절, 제 컴퓨터 즐겨찾기 1번에 저장되어 있던 블로그가 있었는데요. 바로 ‘눌산의 뜬금없는 여행’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오지여행가 ‘눌산’님이 전국 오지 마을에 발 도장을 찍으며 만난 사람들을 취재한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저는 눌산님이 걸어 다닌 발자취를 되밟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고, 아름다운 풍경과 애정 담긴 글에 흠뻑 취했습니다.


아이템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눌산님의 블로그를 들락날락했지만, 사실은 팬심이었어요. 이 분의 카메라에 담긴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풍경은, 그리고 이야기들은 어쩜 이렇게 따뜻할까. 눌산님은 그야말로 취재의 달인이었습니다. 종종 동료작가들과 눌산님의 블로그를 함께 보면서, 우와 우와 감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브런치에서 반가운 작가님을 발견했습니다. 네, 바로 눌산님이었죠.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제가 먼저 브런치로 인사를 드렸고, SNS로 왕래하는 인연이 되었습니다. 용기 있는 팬심의 멋진 결과죠. 그리고 11월 10일, 눌산님의 제안으로 저는 덜컥 전북 무주행 버스를 타고 말았습니다.


2. 김혜정선생님과의 만남


도착한 곳은 무주 설천고등학교.

한 학년에 3개 반, 전교생이 120여 명인 작은 시골학교였습니다. 이곳에는 눌산님의 부인이신 김혜정선생님께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김혜정선생님은 다양한 경험과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뜻깊은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셨고, 저는 방송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진로특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특강이라니요?


선생님, 책 한 권 낸 적도 없고 등단도 하지 못했으며 일개 4년 차 방송작가 경험이 전부인 제가 아이들 앞에서 특강을 할 자격이 될까요?


김혜정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당연하죠! 외치셨습니다. 브런치에서 제 글을 읽고 참 좋았다며, 그냥 편하게 인생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강연 시간은 50분. 50분 안에 저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생초보 강연자인 저는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습니다. PPT를 사용하면 그저 내용 따라가기에 급급할까 봐, 차라리 칠판에 그리면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대화에서 아이컨택은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노트에 할 이야기들을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50분 안에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때론 아날로그 노트 필기와 아이컨택이 진심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강연 당일 날, 저는 김혜정선생님께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가님, 상처받지 마세요.


“작가님, 미리 말씀드릴게요. 강연하시고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여기 아이들은 호응이 없어요. 시골 학교다 보니까, 아이들이 대체로 조용해요. 가끔 선생님들도 리액션이 없어서 상처받곤 해요.”


저는 조용한 강연장을 상상했습니다. 저 혼자 벌벌 떨면서 얼굴이 빨개진 채 더듬거릴 테죠. 갑자기 심장이 방망이질 쳤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선생님, 아이들의 어떤 점이 고민이세요?”

“워낙에 외진 시골이고 주변에서 딱히 롤모델로 삼을만한 어른이 없다 보니, 아이들이 무기력하고 꿈이 없어요. 막연히 졸업하고 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 막연히 돈을 많이 버는 것. 그게 꿈이라면 꿈일 거예요. 저는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큰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전교생 13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 게다가 읍내까지 나가려면 꼬박 30분이 걸리는데, 나가 봤자 갈 데는 PC방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간접체험이라도 했으면 싶은 거죠.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 꿈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저는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께 배우고 있는 설천고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습니다.


3. 작은 학교와 작은 작가의 만남


강연할 교실에 들어서니, 칠판 한가운데에 제 사진을 넣어 만든 강연 포스터가 대문짝만 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마치 작가 팬 사인회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5교시가 끝나자, 제 강연에 신청한 아이들이 하나둘 강연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작은 교실에 30여 명쯤 되는 아이들이 가득 찼어요. 이분들이 바로 제 첫 강연에 참가한 첫 관객들인 거죠.


고1, 고2 아이들은 아직 앳된 얼굴에 웃음이 넘쳤습니다. 막상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니 떨리는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어요. 아이들에게 화려한 성공담은 아니지만, 서른 살에도 꿈꾸는 작은 작가의 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마이크를 들고요.


저는 먼저 칠판에 크게 인생 그래프를 그렸습니다.


당신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세요


출생 – 고교시절 – 대학시절 – 첫 직장 – 방송작가 – 작가


이렇게 챕터를 나누어 인생 그래프를 그렸더니, 고교시절과 대학시절의 그래프가 바닥을 뚫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살면서 가장 우울하고 힘든 시기가 그때였거든요. 고등학교 때 저는 마땅히 꿈이 없었습니다.  


대학시절의 꿈, 첫 직장을 퇴사한 후의 꿈, 방송작가가 된 후의 꿈. 저는 총 세 번의 시기에 꿈을 꾸었고, 그 꿈은 모두 달랐습니다. 돈과 안정, 자기만족의 세 갈림길에서 흔들리던 시기. 저는 시작과 포기를 번갈아가며 변덕스러운 꿈을 꾸며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제 삶에 꽤 만족하며 삽니다. 저는 인생 그래프를 완성하고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꿈이 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꿈은 변덕스러워요.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여러분이 고민하는 돈과 안정, 명예 세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장담컨대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한 가지 길만 걸어갈 순 없어요. 삶이란 건 고약한 자연재해 같아서 갑자기 닥쳐와 어떻게든 여러분을 흔들고 망가뜨릴 거예요. 그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죠. 그 선택이 여러분을 이끌 겁니다. 그 혼란스러운 선택의 갈림길에서, 꿈은 여러분에게 아주 큰 힘을 줄 거예요.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줄 겁니다.”


그리고 저는 꿈집합을 그렸습니다. 수학은 못했지만 학기 초에 배운 집합 부분은 무쟈게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꿈집합의 교집합은 성취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집합과 안정집합, 명예집합의 교집합은 ‘성취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쑥날쑥한 인생 그래프를 그리며 변덕스럽게 꿈을 꾸는 동안 제가 몸소 깨달은 건 성취감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그 성취감이 바로 꿈을 만드는 주재료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쪽으로 치우친 직업과 삶을 선택하든, 반드시 그 가운데에는 성취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앞으로 살아갈 때 중요한 세 가지 팁을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입니다. 매뉴얼은 아니더라도 유용한 팁 정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좋아하는 것을 찾으세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과목은? 날씨는? 사람은? 영화는? 장소는? 등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무엇을? 왜? 어떻게? 얼마나?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해보세요.   


둘째, 재밌고 즐거운 일을 하세요.

아무 조건 없이 재밌고 즐거워서 하는 일, 그런 일 하나쯤은 취미로 만들어 보세요. 취미라고 얕봐선 안 됩니다. 즐거워서 일하게 된 전문가와, 하기 싫은 일 억지로 뻗대다가 경력이 쌓인 전문가는 다릅니다. 즐거운 오타쿠같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나의 무기가 됩니다. 실제로 요즘의 인재상이 몰입의 즐거움과 전문성을 가진 오타쿠로 변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이왕이면 재밌고 즐거운 일을 하세요. 몰입의 즐거움과 성취의 행복을 직접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개성(個性)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긴긴 강연을 했을지 모릅니다. 박찬욱 감독이 얘기했어요. “첫째도 개성, 둘째도 개성, 무엇보다도 오직 개성!” 저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개성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을 말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재밌고 즐거운 경험을 쌓으면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특성을 만드세요. 타인의 잣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개성'이 있는 사람은 어떤 험난한 상황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개성은 삶을 이기는 힘이자, 세상에 맞서는 훌륭한 희귀 아이템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대학 입시를, 대학 전공을, 그리고 직업과 직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혹여나 나중에 여러분이 선택한 게 틀린 길이었다고 좌절하진 마세요. 그땐 어떡하냐고요. 우리는 또 꿈을 꾸고, 다른 길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럼 새로운 삶이 펼쳐질 테죠. 얘기했잖아요. 인생에 딱 세 갈래 길만 있는 건 아니에요. 삶이라는 고약한 녀석은 여러분을 끊임없이 흔들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종잡을 수 없는 깜깜한 길을 선택하고 만들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씩씩하게 걸어가다가 언젠가 한 번, 뒤를 돌아보세요. 그때 알게 될 겁니다. 이노무 고약한 삶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구나. 힘들어도 슬퍼도 괜찮게 살아온 자신이 그렇게 장할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이 사랑스러워진다니까요. 그러니 여러분, 진부한 말이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가세요. 무조건 응원합니다!


4. 작은 이야기, 그리고 작은 변화


이렇게 제 첫 강연이 끝났습니다. 스케일부터 남다른 여행기도 아니고, 화려한 성공담도 아니었어요. 남들처럼 공부만 했고, 일만 했던 어느 작은 작가의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변덕스럽게 꿈을 꾸었다는 것이지요. 서른 살 유부녀가 되어서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작은 어른의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들이 잘 들었을까, 지루하진 않았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하지만 강연이 끝나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다가왔습니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면서요.  


작가님, 같이 사진 찍어요. 사인해주세요. 저, 손 한 번만 잡아주세요. 그리고 작고 귀여운 한 친구가 와락 안기더니 말했습니다.


작가님, 저 좀 안아주세요.


그러자 나머지 아이들도 너도나도 제 품에 안겼습니다.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말로 표현 못 할 온기가 마음에 퍼지고 저는 빨개진 얼굴로 웃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어른이 된 것 같아 뭉클했습니다.


어쩌면 작은 학교 아이들에게는 작은 작가의 말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세상 한 구석에서 나만의 꿈을 가지고 아등바등 삶을 꾸려나가는 작은 작가가, 아이들에게는 공감이 될 수도 있어요.   


잊지 못할 첫 강연이었습니다. 앞으로 또 이런 자리에 서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저는 아이들이 나눠준 온기 하나로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엄청난 파워를 얻은 것 같아요. 이거야말로 프리허그 아닌가요?



작가신청


우연히 누른 버튼 하나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브런치에서 눌산님을 만났습니다. 눌산님의 부인 김혜정 선생님이 제 글을 읽었고, 저는 혜정샘이 일하시는 작은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났고, 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들도 저도, 눌산님과 혜정샘도 모두 행복해졌습니다. 강연을 들은 어떤 친구는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자신의 꿈과 고민에 대해서요.


그래요. 어쩌면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가 스무 살 때부터 글을 끄적거린 것도, 회사를 그만두고 방송작가의 꿈을 꾼 것도,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눌산님을 발견한 것도. 우리가 만나게 된 모든 이유가 되겠지요.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작은 학교에서 벌어진 작은 이야기입니다. 어때요? 정말로 신기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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