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겨울에 배 대신 무

이불 속에서 데워 먹는 무 한 조각

by Dal Kim


아빠는 할머니 분식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무문을 밀자 햇빛이 제 때 찾아오지 못해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마당이 있었다.

어린이 걸음으로 스무 걸음 쯤 걸으면 나오는 회색 문, 그리고 문 안에는 분식집 쪽방보다 좀 더 큰 단칸방이 있었고, 부엌이 딸려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엄마와 남동생을 처음 만났을 것이다.

드디어 평범한 가족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첫 만남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선명하게 떠오른 장면은 네 명이 함께 잠을 자기 위해 누워있는 모습이다. 수면등이라 하기엔 텔레비전 불빛에 눈이 부셨다. 아빠는 대뜸 시원한 과일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개운한 과일을 좋아했다. 특히 채소와 과일 사이를 오가는 과채류를 즐겨 먹었다. 그 때 아빠는 참외나 배 따위를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자, 이거라도 먹자.”


아빠는 쏜살같이 나가더니 쟁반 위에 무를 썰어왔다. 그 날은 매우 추웠으므로 이불과 야외 부엌을 오가는 아버지의 행동은 잽싸야만 했다. 케이크와 샴페인이 아닌 차가운 무로 가족이 된 것을 자축했던 것일까. 이불 속에서 씹는 그 날의 무는 아삭하고 씹을수록 달았다.


우리는 그날… 분명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막 썰어낸 무가 알싸함을 풍기지만 씹을수록 단 물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결국은 달콤해질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배 대신 무를 가져온 아버지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헤헤거리며 웃었다.

아마 두 어른은 소박한 행복만으로도 거뜬히 살아낼 수 있다고 다짐했을 지도 모른다.


그 날의 화목함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웃었던 날이 손꼽힐 정도로 적어서였는지, 혹은 무가 생각보다 달아서 기억에 남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아무도 내게 엄마와 동생은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오랜 시간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고, 한 집안의 장녀로 살게 되었다.


한 동안 우리는 매서운 한파를 막아낼 든든한 집을 갖지 못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겨울엔 이불 속에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 엄마, 첫째, 둘째 순서가 아닌 항상 아빠, 엄마, 둘째, 첫째 순서대로 누워 있었다.


그 녀석의 베개는 길고 솜이 많았는데, 내 배게는 유독 짧고 낮아 보였다. ‘내 베개도 긴 걸로 바꿔 주세요.’ 라고 나는 한번이라도 요구했었을까. 아마 못했을 것이다.


난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봇대 위를 이륙 지점으로 삼아 동네를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 밖에선 ‘의도치 않게’ 여기 데굴 저리 데굴 하며 동생의 몸과 자주 부닥쳤다. 그럴 때면 동생은 주먹으로 내 얼굴이나 옆구릴 때리곤 했다. 잠결에 너무 아파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내 베개 속은 침과 눈물로 늘 누랬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기념하는 무의 맛이 무색하게도, 행복을 향한 다짐은 추위에 독해진 무처럼 단맛을 잃고 매운 맛만 남았다. 나와 내 동생은 싸움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서로를 헐뜯고 때렸다. 싸움의 기운이 전염되었던 것일까. 어른들의 싸움 역시 잦아지고 격렬해졌다. 싸움의 주제는 언제나 나와 돈이었다.


아버지가 썰어온 무 조각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얼어붙었다. 추위에 날이 선 채로 언 마음들은 내내 부딪치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냉장고에 오래 처박아 둔 무를 뭉근히 끓이면 다시 단맛이 스며 나오는 것처럼, 우리도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많이 달라져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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