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2023)

1920년 오스트리아를 잠시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여권같은 책

[다이어터 치즈냥 : 1920년 오스트리아를 잠시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여권같은 책]


표지/문체 : 표지는 대체로 만족. 페르소나의 가면 / 화장대 앞의 여자도 고려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영화화 가능할 것 같은 이런 문체는 처음 본다.

다른 책과의 차이 : 절제 되면서도 깔끔하면서도 정밀하면서도 섬세한 표현들


책을 덮고 나서는 일련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여독이 몰려왔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엿보면서 ‘세대를 뛰어넘어 사람사는 이야기를 내가 알 수 있다니. 소설의 묘미란 이런 것인가?’를 깨닫기도 했고, 소설 속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책장 속 시간을 탐험하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내 일상의 문제가 곧 시대상의 문제였기에, 그 시대 사람들의 고뇌와 욕망을 알아감을 통해 그렇게 되어야 하는 시대상까지 같이 바라볼 수 있었다. 더구나 주인공의 시간과 공간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와 전혀 다름에도 감정이 그대로 공유되는 듯한 경험은 ‘사람의 본질이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불러일으켰다.


특히 우체국 아가씨, 크리스티네가 자기가 알던 쳇바퀴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 이모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탐험할 때는 내 귓가에 발랄한 음악이 들리는 듯 즐거웠다. 이모와 함께 자신의 출신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는 나도 같이 초초해 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쯤 느끼던 절망감의 모습은 나도 무기력하게 만들어 세상을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듯 했다.


남자, 페르디난트를 통해서는 전쟁이란 무엇인지 엿보았다. 전쟁은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일으켰고 모든 불행의 이유가 되었다. 영민하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임에도 그랬다.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현실은 참혹했고, 원망할 대상조차 빼앗겨 버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비극은 그저 그림자 같은 것이었고 삶은 잔인한 동화와 같다는 것이 실로 느껴졌다.


전쟁 후 삶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가장 강력하게 느껴진다. 꼬릿꼬릿한 냄새가 나는건 아닌데 뭘 해도 기운없고 핏기 없는, 누더기를 입은게 아니더라도 행색이 남루해서 초라한, 먹고 사는것도 문제지만 마음이 더 허기진, 노력과 의지의 문제보다 운명이 앞으로는 단 한 번의 재기할 기회도 안 줄 것 같은. 세상 모든 절망에 절여진 취약함이 나와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 같은 냄새 말이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태평성대를 제외하고는 먹고사는 현실을 가장 큰 문제로 삼았던 것 같다. 1920년 사람들뿐만 아니라 1700년대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고, 150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쩌면 더 춥고 배고픔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대 기근으로 아사한 사람들의 삶은 어찌했을 것인가. 사람들이 죽어 나감에도 어찌 할 도리 없던 세상의 날씨가 오늘과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남자는 힘을 써서 생활의 근간을 마련하고, 여자는 양육하고 보살핀다는 전통의 개념이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희석되긴 했지만, 오늘날 헐벗고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에서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만일, 살아남는다면, 물질적인 부족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사람들을 더 크게 망가뜨리는 것 같다. 남자의 전쟁 후 PTSD는 쉽게 극복되었지만, 과연 저렇게 쉬운 문제일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내게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갈 예정이다. 본토에 전쟁이 없어 절망에 절여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여자와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응원하겠지만, 머리를 굴려 저 정도의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계획하는 그 무엇보다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에 가는 티켓을 얻는 것을 먼저 목표로 해봤으면 좋겠다.


별첨.

100년, 200년 후에도 공감하며 읽혀지는 책들은 무엇이 다를까? 글이 독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어서일까? 소설이 도입-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막 구조로 잘 써있어서 몰입감이 잘 들기 때문일까? 문장에서 느껴지는 표현들이 간단명료하나 세심하고 다정하기 때문일까? 이번 경험으로 창작소설 보다는 시대상을 담은 과거의 소설을 조금 좋아할 것도 같다.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스테판 츠바이크’ 인간의 내적인 감정과 심리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서술하는 그만의 특유한 재능,


[친근한 초과이익 토끼 :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결정해버린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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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세상을 받아들이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크리스티네. 그녀는 부자 이모의 즉흥적인 초대를 받아 상류층의 삶을 일주일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 그녀 안에는 이전과는 다른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 짧은 경험은 그녀의 삶에 균열을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실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분노와 가까운 감정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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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이 아니라, ‘우체국 아가씨’를 덮는 순간만큼은 이 소설에 대해 내가 느낀 바를, 아니 그뿐 아니라 소설에 대한 나의 보편적인 가치관까지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완독한 지 시간이 꽤 지나버려서 그 순간의 상념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다른 시대를 그린 소설을 접하다 보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각자가 살아가는 환경은 다르지만, 개인의 삶에 담긴 정서와 상념,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나는 앞서 고민하고 고찰하며 결론을 내린 현인들의 생각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를 받기도 한다.

철학이라는 수단으로 현인들의 생각을 고찰하는 것도 좋지만, 특히 문학을 통해 접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철학이 명제의 형식으로 정리해 보여주는 것은 분명 강력하지만, 명제로 표현되는 순간 의미가 납작해져 버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 의미를 가능한 한 형태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전달한다. 그래서 나는 고전문학을 읽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다.


우체국 아가씨를 읽는 동안 마치 내가 각각의 등장인물이 된 듯 그 감정선을 따라가며 환희, 조바심, 분노, 걱정, 우울을 경험했다.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느꼈는데, 이후 ‘기차의 꿈’을 연달아 읽고 나서는 그 능력에 더욱 감탄했다.(기차의 꿈에서는 이런 감동을 받지 못했기에)

나도 ‘우체국 아가씨’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 회사에서 반복되는 일상, 큰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 삶. 내가 그녀와 다른 점은 아마도 내가 일상에 만족한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삶 속에서 꾸준히 기쁨을 찾고, 스스로와 타인을 존중하며, 일상 속에서 창조하는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이 일이 가능한 것도 아마 전쟁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가 크리스티네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기존의 일상에 삶의 끝을 생각할 정도로 불만족하고 있다면, 환경 전체를 바꾸어버릴 만큼 과감한 선택을 했을까.


이 소설은 작가의 유작이다. 작가는 스스로 미완성 작품이라 생각해 출판사에 투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작가는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전쟁 이후 끝없이 이어진 불안과 망명 생활 속에서 희망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인간은 문학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며, 결국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가 현재 영위하는 이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하루를 지탱하는 작은 기쁨들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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