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다는 뫼르소의 삶에 대한 태도를 따라갈 때 비로소 이해되는 책
저자 (알베르 까뮈)
[다이어트 치즈냥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봄직 하다]
주요내용 : 삶에 지친 프랑스인 뫼르소가 일상속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을 맞이했다. 그리고 여행지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아랍인을 죽여버렸다. 감옥에 같혀 재판을 받았고 사형되기 전에 소설이 끝난다.
표지/문체 :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인간 뫼르소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표지에 반사판 거울을 붙여놓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방인’이라는 책은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 읽는 동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들이 연이어 들지만 종국에는 문제의식 없이 가볍게 책을 읽고싶어하는 사람의 뒷통수를 ‘팍’ 때린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이제쯤 나랑 맞아지는가보다 했지만, 되돌이표다. 책을 다 읽고나면 이게 뭔지 처음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 쪽수는 적지만 막상 책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더 길다.
무엇이 이방인 같은가? 작가가 얘기하는 꾸며내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모습이 이방인 같은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마음속 저 넘어까지 애도를 하지 않은 모습이 이방인 같은가? 햇볕이 세다고 총을 쏴버리는 모습이 이방인같아 보이는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살아남기 위해 증언을 번복하지 않는 모습이 이방인 같은가? 사형대에 올라가기 전 사제를 만났음에도 자신의 명복조차 빌지 않는 모습이 이방인 같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 이상했지만 결국 내게 이방인은 없었다. 주인공의 자리에 뫼르소 대신 내가 서 있었을 뿐이었다. 뫼르소가 벌인 일들을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단속적인 개별 이벤트로 놓고 보자, 대부분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일부 들었다. 그러나 우연의 작용으로 수습하기 힘든 일이 한 번씩 벌어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의 평가가 바뀐다. 가장 안 좋은 것을 축으로 모든 것들이 연대하여 뜻하지 않는 해석으로 주인공은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 가벼운 일은 기분을 제어하지 못해서 충동적으로 일어났다고 얘기하며, 그때는 이렇게 될지 미처 알지 못해 죄송했다고 얘기하며 수습한다. 심오한 사주와 점성술, 종교의 세계를 빌려오면 어떤 기운 때문에 운이 좋지 않았다고 표현하며, 마가 껴서 액운을 막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얘기한다. 더 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한다.
뫼르소는 막무가내식의 삶을 사는 살인자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성과 인내심이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듣고 공감해 주기도 하며 주어진 일을 척척 잘 해내는 똑똑이다. 삶에 관해 얘기할 때는 생각 있는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을 터무니없는 이벤트로 날려버렸다. 이 삶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왜 잘못되었을까?
뫼르소는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기가 바빠서 지쳐서 삶을 회고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오늘 살아온 삶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점검하지도 않았고, 내 삶을 쥐고 있는 우선순위가 맞는지 살펴보며 자신을 돌보지도 않았다. 원하고 추구하는 것 없이 그저 삶을 버텨나갔을 뿐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기 쉬운 상태로 살았다. 결국 감옥에 가서야 자신의 삶을 충분히 회상할 기회와 시간을 얻었을 뿐.
삶을 살다 보면 인생에는 순간적인 불연속점이 생긴다. 어제까지 내가 무엇을 했건, 어떤 삶을 살아왔건, 삶이 명확하게 연속적으로 흐르지 않는 포인트가 있다. 뭔가 끝난 해방감일 수도, 그저 잠을 자지 못한 피곤함일 수도, 술을 마셔서 기억이 끊겼을 수도 있다. 이런 불연속점의 의미는 그 전의 삶을 돌아보고 방향을 이어 점검하라는 쉼터일 수도, 그 전의 삶이 너무 좋았음을 시샘한 누군가의 함정일 수도, 새로운 기회를 잡으라는 기회일 수도 있다.
매 순간 회고하는 삶은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인생을 흐르는대로 살았을 뿐인데 삶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무슨 날벼락같은 일인가? 우리가 항상 의식적인 삶을 사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진데, 깊이 진중히 생각할 만한 시간과 사고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면 우리는 데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게다가 운이 내 편이 아니라서 손대는 것마다 나쁜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고?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나쁜 일이 생기는 날은 또 언제고 매일 점이라도 치면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은 가능한 것인가?
인생의 불완전함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것을 지키려는 것’인듯 하다. 김창옥 교수가 말했듯 ‘내가 지키는 것이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다. 나를 지켜주는 무기들을 삶의 무의식 속에 숨겨놓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줘서는 안된다. 증오대신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 군자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충(忠), 서(恕). 우리가 법률이 아닌 도덕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고, 칸트가 ‘도덕은 의무다’라고 강조한 이유가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오늘 사는 재미를 느끼고 인생을 즐겨야 하는 이유와 내가 지킬 것들이 늘었다.
키워드 : 이방인의 정의,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도덕은 왜 필요한가?, 선을 넘으면 안된다. 우리 가정과 그 애정을 지키는 것 그 방법.
P.S 프랑스 소설은 항상 이상한 가치관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무엇인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느낄때에는 조금 늦은 시기도 있다. 반면에 나는 동방 예의지국에서 태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생겼다.
[친근한 초과이익 토끼 : 내용보다는 뫼르소의 삶에 대한 태도를 따라갈 때 비로소 이해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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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는 위험을 겪게 된> 어떤 젊은이가 술책을 쓰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음으로써 결국에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 (카뮈가 쓴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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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학은 생애 모든 시기에 걸쳐 일관된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은 나이를 먹고 특정한 순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의 의도가 와닿기도 한다. 내게는 카뮈의 ‘이방인’이 그러했다.
20대 초반, 미숙했던 당시의 내가 처음 접한 ‘이방인’은 그저 무미건조한 줄거리로만 다가왔다. '어머니의 죽음에 덤덤하던 주인공이 사람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상식적이지 않은 이야기. 이 서사를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칭송하는지, 의문만 가득 남았다.
다시 ‘이방인’을 펼쳐 든 것은 실존주의적 사유에 알아가기 시작한 20대 후반 무렵이었다. 그리고 30대 후반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내 삶에 겹쳐 이 작품을 놓아두고 독후감을 써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은 다시 봐도 상식적이지 않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다거나 이미 죽은 아랍인에게 총을 다시 쏜다던가 하는 행위들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반면, 일상 생활에서의 뫼르소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번거로운 의무 앞에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거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쫓는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는 거창한 의미나 윤리적 의무보다, 지금 당장 내 피부에 닿는 감각과 피로에 더 솔직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고단함이 감정을 마모시켜, 삶의 무게에 절여진 채 자기만의 정직한 감각에 충실했던 것이 아닐까
그 뒤, 아랍인을 죽인 이유로 감옥에 구금되자 뫼르소는 ‘생각’을 시작한다. 탈옥이라던가. 상고라던가. 감각적인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그는 ‘죽음’을 납득한다.
“당신은 그처럼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어, 그렇지? 하지만 당신이 확신하는 것들 중, 여자의 머리카락 한올만큼의 가치라도 갖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당신에겐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을 꺼야. 마치 시체처럼 살고 있으니 말이야. 반면에 나는 마치 두 손이 텅텅 빈 사람같아 보이겠지. 하지만 난 나 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모든 것에 대해 확신해, 당신보다 더, 나는 내 삶과 이제 곧 닥칠 죽음에 대해 확신해. 그래, 나한텐 그것밖에 없군.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진실을 꽉 움켜쥐고 있어.”
평온해진 그에게 찾아온 한 사제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자, 뫼르소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결국, 카뮈는 이 문장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제가 상징하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이나 '허구의 구원' 대신, 비록 텅 빈 손일지언정 자신이 직접 겪고 느낀 '현재의 진실'만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사형을 앞두고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며 뫼르소는 역설적이게도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
카뮈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며 부조리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 때문에 우리가 현재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고, 시스템에 갇혀 자신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경계(반항)했다. 하지만 이방인을 이해했다고 해서 뫼르소의 모든 태도나 행동이 단번에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문득 근본적인 의문이 고개를 든다. 허구의 구원을 믿거나, 시스템 속에서 가면을 쓴 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과연 나쁜 것일까. 본래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날 것의 실존을 견디기보다,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 단 한 순간도 연극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사회가 요구하는 '다정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건네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모든 연극이 사실은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뫼르소처럼 투명하게 정직할 용기가 내게는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다정함은 뫼르소의 '나로 존재하기'와 사회적 '연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페스트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