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조직

소속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d-27]

by 약방서가

석사논문을 채 다 쓰기도 전에 호다닥 취업을 했다. 첫 직장은 미국계 제약사였다. 지금은 국내 기업도 "**님"으로 부르는 문화가 흔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회사가 드물 때였다. 심지어 내가 다니던 중에 사무실을 이전하더니 직장인의 보금자리인 개인 책상도 없애버리고 스마트 오피스로 갈아탔다. 기억하기로는 -제약업계가 조직문화 변경에서는 꽤 빠른 편인데도- 업계 최초였던 것 같다. 오매불망 회사 편인 인사부조차도 "회사에 목매는 직원은 부담스럽다.."라고 할 만큼, 개인의 성장과 조직의 성장을 중요시하는 -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직원의 평생직장은 보장해줄 수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회사였다. 시작할 때부터 내가 맡은 업무의 선이 분명하고, 설령 직속 상사라 하더라도 인사/행정적인 매니지먼트만 담당할 뿐 내 프로젝트에 대해서 온전히 백업조차 할 수 없었다.


첫 시작을 그렇게 해서였을까? 그보다는 조금 더 규모가 크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문화의 잔재가 조금 남아있던 회사-놀랍게도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법 상, 외국계 회사가 그 자체로 법인을 설립할 수 없어서 공동투자 형식으로 들어왔다고 한다-로 이직을 했을 때도 조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직무를 좇아 이직을 했지 회사를 보고 옮긴 것은 아니었으니까. 직무만 생각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은 회사였다. 규모도 컸고, 허가등록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래 먹거리- 우리는 파이프라인이라고 부르는-도 다양하게 많았다. 사실 회사가 어떻다 해도 직무를 변경할 수 있으면 옮겼을 터였다. 일단 이직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문화인 것 같기도.


언제나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을 사랑했다. 프로젝트가 재미있었고, 규정을 읽고 행간을 해석하는 묘미도 충분히 즐겼다. 밀고 당기는 협상도 좋았다. 결과가 좋으면 더 신이 났다. 허가등록 일을 한다고 해도 신약을 허가받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래도 운 좋게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허가받은 아이들은 꼭 내 자식같이 각별히 여겼다. 허가 이후 자잘한 변경들에도 행여나 처음 빛이 바랠까 싶어 애지중지 돌보곤 했다. 심지어 이제는 이직해서 남의 회사 제품이 되었음에도 약국이나 병원에서 그 아이를 만나면 무척이나 반가웠다. 꼭 물리적으로 회사를 다니지 않더라도 기회가 되면 외주를 받아서라도 지속하고 싶은 일이라면 너무 이상할까.


반면, 회사 조직 그 자체에 자부심을 가진 적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조직은 떠나도 경력은 남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프로젝트를 잘 해내고 싶었던 이유도 회사에 기여한다기보다는 일단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일뿐더러 개인의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 태생적으로 팀 프로젝트는 거의 없이 -전무한 정도- 개인의 프로젝트에 방점이 더 크고, 구성원 각자의 업무가 명확히 분리되는 조직 문화에서 일을 배운 탓이라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것 같던데.. 설마 나만 그랬나.


가끔, 현재의 소속 또는 무려 과거의 어떤 소속에서까지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볼 때 그 마음이 의아하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늘 "직장인"보다는 "직업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와 굳이 어딘가에 "** 소속"이라며 소속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으나.. '자부심'을 가지고 과거의 직장을 대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후회? 미련? 자랑스러움?) 정도는 알고 싶다. 현재로서는 미래의 내가 할 생각까지 예측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러니 나도 이번엔 사무실 로고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둘까 한다. 언젠가 추억하고 싶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