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백 Jan 09. 2021

이놈의 머리가 왜 이러지? 사방팔방 제멋대로 뻗쳐 감당이 안되네. 드라이를 해도 안 먹히고 그냥 두면 산발이고… 내 원참, 살다 살다 이런 일은 또 첨일세. 다 그 쌩콩 맞은 미용사 때문이야. 머리 하러 간 첫날 절대로 펌은 안된다나, 반곱슬이라 롤 스트레이트를 해야는데 머릿결이 받쳐주질 않는대. 가만둬도 상하는 머리라고 타박까지 곁들였지. 곱슬이지만 결이 나쁘다는 소리를 들어보진 못했거든. 그럼 어떻게 하느냐 물으니 그녀는 턱을 추켜세우며 거울에 대고 말했어. 클리닉을 해야죠. 머리에 영양제 한번 안 주고 여적 버텨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 두말 않고 맡겼지. 그것도 제일 비싼 걸루.


살짝 기분이 상하기는 했어. 툭툭 내뱉는 말투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거든. 아가씨라 그런가. 미용 경력 십오 년차라는 자신감 때문인지 모르겠어. 나이 들어가면서 젊은이들에게 주눅이 들어가는 것도 한몫했을 거야. 이름을 걸고 하는 체인이니 세련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었어. 이른 시간이라 넓은 미용실에는 그녀와 나 둘 뿐이었어. 침묵이 흘렀지만 겉도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어.


그녀는 내 머리에 슈크림 같은 걸 듬뿍 발라 빗으로 골고루 빗겨 내렸어. 그리고는 비닐 캡을 씌웠어. 어색함을 벗어나려고 나는 핸드폰을 열었지. 문서에 깨작깨작 쓰다만 글을 수정이나 할까 싶었어. 미완인 채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글들을 끝맺음할 날이 올지 모르겠어. 집중을 좀 하려는데 캡을 벗겨냈어.


머리를 감으니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강아지 털처럼 매가리 없이 쫙 늘어졌어. 모처럼 멕여놓은 영양제에 흠뻑 취한 모양이야. 쭈뼛거리며 숨어있던 흰머리도 유난히 눈에 띄었어. 펌은 일주일 후, 염색은 또 그다음에 해야 한대. 머리 모양이 인물을 좌우한단 말 맞아. 몰골이 추레하니 외출도 싫고 사람 만나기도 싫었어.


평소에는 그렇게도 빨리 가던 날이 왜 그리 더디던지⋯. 일주일이 되던 날, 부푼 마음으로 미용실에 갔지. 그녀는 여전히 처음 대하는 손님처럼 냉랭하게 맞았어. 어떤 펌을 할거에요? 지난번 다 말했는데 잊어버린 건지, 다시 확인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또 설명을 해줬지. 자신 있게 답하던 그때와는 달리 다른 펌을 권하는 거야. 의심쩍긴 했지만 전문가 말을 따르기로 했어. 실은 그동안 내가 해오던 펌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거든.

  

전에 다니던 미용실에서는 알아서 척척 해줬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미용사는 솜씨도 좋고 상냥하고 부지런했어. 항상 간식거리를 직접 만들어 손님들을 대접할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정성을 다해 머리를 만졌어. 싫증이 날 때도 있었지만 한결같음에 이십 년을 넘게 다녔나 봐.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지기도 했고. 어느 때부터 균택이 엄마 머리도 하얘진다며 자기 일인 양 한숨을 지었어. 자기는 미용사가 늙어 보이면 손님들이 싫어한다고 주름을 펴는 성형을 하더라고. 자연스러울 때가 더 예뻤는데 인상이 강하게 바뀌었어.


혼자서 아들 둘을 키워 낸 지난한 세월은 나만 아는 비밀이야. 아픈 큰 아들 때문에 일을 놓지 못하는 엄마를 작은 아들은 돈벌레라며 경멸한대. 호강은 아니어도 마음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다며 그녀는 눈물을 찍어내곤 했어. 며느리를 보고 나서는 신세 한탄이 더 길어졌어. 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내는 말폭탄에 나는 지쳐 자빠질 지경이었지. 미용실을 바꿔야겠다 마음먹었어. 어머, 그런데 내 맘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전화가 온 거야. 가게를 그만두게 되었어. 이제 나도 좀 쉬려고, 얼굴도 못 보고 작별 인사를 하게 됐네. 그동안 고마웠어. 정당한 알리바이가 생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


롤을 풀기 시작했어. 전보다 두 배나 빨리 나온 걸 보니 역시 기술이 다른가 봐. 구불구불 봉긋봉긋, 지나치게 짱짱하다 싶었어. 그녀는 컬이 풀리니 다음날까지 감지 말라했어. 그래도 처음엔 드라이로 한 번 쫙 펴면 좋겠더라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럼 풀어졌다 뭐라 그럴라구요? 라며 그녀가 톡 쏘아붙였어. 시키는 대로 이틀 후에야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했지. 그런데 아무리 펴도 다시 뽀글이로 되돌아와 버리는 거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며칠 동안 강한 컬과 씨름하다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


망설이다 미용실을 다시 찾았어.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기가 그럴 거라 미리 주의를 줬다는 거야. 곱슬은 웨이브펌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건 자기였으면서 말이야. 자기 엄마에게 화난 감정을 엄마뻘인 내게 투사시킨 건가, 나를 물로 봤나, 애인과 헤어져 그런 걸까. 아니면 그녀의 성향일지도 모르지. 사람마다 결이 다르니까.


실력은 솜씨로 보여줘야지 말로 백번 하면 뭐해요. 잘난 체는 실컷 하더니 이 머리가 지금 정상으로 보여요?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말들을 목구멍 속으로 꾹꾹 밀어 넣었어. 그리고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어. 다시 풀어주세요. 그때서야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아까워서 어떡하느냐 나긋하게 말하더라고.


미용실 문을 나서는데 전에 다니던 단골 미용사가 간절히 생각났어.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사실도 모르고 연락해줘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내 머리가 지금 어떤 지경인지 하소연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어. 고마워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말도 물론 하지 못했지.


망가진 머릿결은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야. 결이 다른 사람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날이 언제쯤 일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작가의 이전글 먹자골목 일미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