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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Jul 23. 2021

칸나는 아직 피고 있겠지


 

감기에 걸려 학교에 가지 못한 날이었습니다. 약을 먹고 푹 자고 난 오후였어요. 벨소리에 문을 여니 오빠를 따라 당신이 쏟아지는 빛과 함께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눈이 부셔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봄볕 때문이었는지, 감기약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나는 열다섯, 당신은 열일곱. 우리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당신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성으로 가까이 마주한 첫 사람이었고, 다정한 눈빛이 좋았고, 그리고 나와 처지가 같은 때문이었을까요. 누나들과 함께 살고 있다 했습니다. 외아들을 떼어 놓지 못하는 엄마를 누나들이 설득해 서울로 데려 왔다지요. 나도 그런 연유로 부모와 떨어져 오빠들과 살고 있던 터였습니다. 


당신은 어떤 때는 기다림보다 빠르게, 또 어느 때는 느리게 왔습니다. 반가워하는 내색도 못하는 내게 미소로만 답해주었습니다. 나처럼 부끄러움을 타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주저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머문 공간은 언제나 훈훈했습니다. 


오빠와 셋이 어린이 대공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한 첫 나들이였지요. 칸나가 피어있는 길을 걷다 당신이 말했습니다. 가족들이 막내인 나를 ‘깐나’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꽃 이름이 너와 비슷하다고, 꽃이 너처럼 예쁘다 했습니다. 내 얼굴이 꽃처럼 붉어지는 걸 느껴졌습니다. 오빠는 우리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한 발 앞서 걷고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 땐 고향집에 함께 간 일도 있었군요. 당신은 집을 떠난 첫 여행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떴습니다. 그날 뒤란 우물에서 허벅지를 걷고 다리를 씻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요. 당신 얼굴이 우물가를 기웃대던 수탉벼슬처럼 붉어졌습니다. 오빠 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 채 우리의 시간이 쌓여갔습니다.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오빠에게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나를 보면 그저 ‘잘 있었어?’라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말 속에 보이지 않은 마음이 다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라도 부르면 달려와 줄 것 같은 사람, 원하는 무엇이든 다 들어 줄 것 같은 사람. 그런데 때때로 왜 그리 슬퍼 보였을까요. 오히려 당신을 보듬어 안아야 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와는 어렸을 적부터 떨어져 지냈다 하더군요. 항상 부정(父精)에 목말라 한다 했습니다. 당신에게서 묻어나는 쓸쓸함이 그 때문이었을까요. 아버지와 함께 둘러앉은 우리집 밥상 풍경이 그렇게 부러웠다구요. 당신은 내 아버지를 무척이나 따랐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데리고 집근처 명승지나 유적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막내아들로 맞아들였지요. 우리는 호적에도 없는 오누이가 되었습니다. 


오누이 사이로 규정되어버린 까닭에 가족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었던 우리는 마음을 닫고 말았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소식마저 뜸해졌지요.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내장 하나가 쏙 빠져 나간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맘에도 없는 남학생들과 미팅을 하고 연애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그림자처럼 당신이 따라붙었습니다. 나와 같은 교정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한번이라도 마주칠까 같은 학교를 선택했다구요. 수없이 겹쳤을 동선을 피해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까요. 졸업식날 연락도 없이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애태웠던 날들이 칸나 꽃처럼 다시 피어올랐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눈을 피해 광화문과 종로 뒷골목을 쏘다녔습니다. 내 방 창문 앞을 숱하게 서성였다는 말에 마음속 골을 타고 포근한 바람이 불기도 하고 냉한 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했습니다. 대학 강단에 서고 싶었던 당신은 내가 직장인이 된 후에도 학생 신분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관계로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가기엔 멀고 먼 길이었습니다. 신부수업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채근을 핑계 삼아 당신에게서 도망을 쳤습니다. 


당신은 매일 아침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드리더군요. 혹시나 나를 찾을까 곁을 떠나지 못하고 차례를 기다렸지만 아마도 나를 잊기로 한 모양이었습니다. 산 그림자가 내려오는 해질녘이면 들길을 걸었습니다. 바람이 살랑댈 때마다 마음에도 파문이 일었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어떨지, 언제쯤이면 아픔이 무디어질지. 상처에 덧칠을 해대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문득 네가 보고 싶다.’ 는 딱 한마디였습니다. 천리 길을 달려온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오열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열린 대문으로 당신이 걸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지나는 길에 들렀다는 당신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아셨을까요. 우리는 짝을 찾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둔 길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암말 않고 내 앞에 등을 내주었습니다. 나는 꿈같은 현실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등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다음날로 당신은 길을 나섰습니다. 읍내로 가는 둑방길 끝에서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화창한 햇빛을 가르며 한줄기 바람이 스쳐갔습니다. ‘이것이 설령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나는 행복하였네라.’고 한 시인은 어찌 이별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와 당신의 온기가 남아있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당신으로 보였습니다. 사랑을 이기는 것이 정이라 했던가요. 누구라도 만나 살면 그만 아니겠어요? 선을 보고 순조롭게 혼담이 진행돼가던 차였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난 것은 새로 태어난 조카를 보러 오빠 집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당신도 친구 아들을 보러 왔다 했습니다. 어긋날 운명이라면 그런 우연이 일어나기나 했을까요. 


역까지 가는 길에 눈이 내렸습니다. 당신은 내 결혼 소식을 오빠에게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사랑했기에 이제 보내겠노라고. 마주보고 한 첫 고백이었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을 마지막 인사로 남겨뒀던가 봅니다. 나는 꼭 당신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짐 부리듯 내려놓는 그 마음을 나는 행여 놓칠세라 얼른 받아 안았습니다. 


당신과의 기억이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당신에게 가는데 걸린 시간과 부부로 산 세월을 합하면 거의 반평생이 되어 가는군요. 행복한 종말이라는 꽃말을 가진 칸나처럼 우린 지금 한껏 꽃 피우고 있는 거지요?

                    

** 33년간 직장 생활을 마치고 정년 퇴임하는 남편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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