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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Dec 13. 2021

중독이라는 독성

물안개 자욱한 강둑에 나팔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꽃은 새벽부터 말간 얼굴로 하늘을 향해 한껏 고개를 쳐들고 있다. 바람은 에돌아 대나무 숲만 흔들고 지나간다. 산책을 마치고 되돌아 올 즈음 홍시 같은 해가 불쑥 솟아올랐다. 


남편의 대부代父내외와 우리 부부는 일주일 예정으로 이곳에 왔다. 올 들어 정정하던 두 분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자꾸 휘어져 갔다. 지난봄 구입한 농가주택 수리가 끝나면 한 번 모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차일피일 미루다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일던 차였다. 


아이구야, 누런 들판이 얼매나 이쁘노. 미안한 맘 덮어두고 고마 즐겨뿔란다. 

대부는 답답해 하는 아내를 위해 우리에게 함께 떠나자 부탁을 했노라며 계면쩍어했다.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이라더니 얼마나 자상한 배려인가. 그녀는 다니는 내내 감탄을 연발했다. 가을걷이를 앞둔 들판과 닮은 황혼기의 부부는 어디서든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사흘째 되는 날 새벽이었다.

탁 탁 탁!!!

마루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보고 들어왔는데 무슨 일일까. 잠결에 몸을 일으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왜 그러세요

아니, 검은 물체가 기어가길래 손으로 힘껏 눌렀더니 갑자기 몸을 베틀어 무는 거야.


바퀴벌레로 알고 잡았다는 벌레는 십 센티가 족히 되는 지네였다. 세상에, 수십 개나 되는 지네발이 움직일 때마다 스적 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크기도 바퀴벌레 열 배는 돼 보였다. 파리채로 난타당한 지네는 흑녹색의 번들거리는 등을 바닥에 납작 대고 기척이 없다. 떨어져 나간 발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대나무 마디처럼 단단한 몸통에 붙으면 금방이라도 살아나 도망갈 태세다. 


대나무가 많은 곳에서 서식한다더니 마을에 있는 숲 때문인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모습을 보자니 소름이 돋았다. 지네와 사투를 벌인 대부는 손으로 물린 자리를 힘껏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 위쪽에 불그레한 두 개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독이 퍼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다. 창밖에는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내려앉아 있다. 


대부는 상처부위가 씀벅거리고 아프다며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지네발에 신 발 꿰어 신기듯 우왕좌왕하는 우리 곁에서 그의 아내는 인터넷을 뒤져 독성을 풀어준다는 민간요법을 찾아냈다. 나는 아침에 봐 두었던 나팔꽃을 따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나무 울타리에서 청보랏빛으로 해를 맞던 나팔꽃은 밤이슬에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정신없이 꽃을 훑어다 짓이겼다.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은 상처에 물기가 닿기도 전에 말라 버렸다. 안심이 되지 않아 밤 속껍질을 빻아 밀가루와 개었다. 도톰하게 바르고 그 위에 붕대를 감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대부는 겁먹은 아이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 겁이납니꺼. 곧 괜찮아 질기라요.

그녀는 어린아이 다루듯 남편을 자리에 누이고 두 손으로 얼굴과 팔을 쉼 없이 어루만졌다. 나를 두고 떠나면 안 된다는 몸짓 같기도 하고, 이런 당신을 두고 내가 먼저 가면 어쩌나 하는 무언의 언어 같기도 했다. 저런 모습으로 마디마디 반세기를 이어 왔구나. 순간 그들의 세월이 와락 안겨왔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물고 물리는 관계다. 나팔꽃처럼 마주 보고 피어났다 오므라지고 마는 꽃잎처럼 서로 통하지 않을 때는 마음을 닫고 만다. 때로는 촉수를 곧추 세워 상대를 향해 독을 쏘거나 그 독을 빼내기도 한다. 독인지도 모르고 맞서고 치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중독된 상태다. 그 중독이라는 독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걸까. 어쩌면 켜켜이 응축된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쌍을 지어 다닌다는 지네는 졸지에 짝을 잃었다.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한 놈이 마룻장 밑을 기웃대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밤마다 작은 소리에도 귀를 번쩍 세웠다. 덧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나팔꽃은 아침마다 활짝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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