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쳐지는 대로 읽으려 했습니다. 시와 산문이 섞여 있어 소설처럼 권당 독서를 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작가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길이와 글 분량도 고저를 두고 글과 글 사이에 시간을 줘서, 한 번에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독자가 느끼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요. 그러니까 쉬엄쉬엄 편당 독서를 하려 했던 거지요. 그런데 첫 장 ‘그늘’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읽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어찌나 애틋하고 소중하게 그려내는지, 문장마다 절로 맞장구가 쳐졌습니다.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었어. 그 감정 이해할 수 있어, 하면서요. 삼십 대인 그의 감수성에 삐득삐득 말라있던 내 감성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부드러운 은유와 어휘로 잔잔하게 그려낸 그의, 또는 이웃의 소소한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몸으로 부딪히고 마음으로 고뇌한 때문일까요. 너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나의 이야기가 되어 쉬 마음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마음은 붙들어 놓고 정작 시인은 묵묵히 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시인은 이미 살아 있음에 대해, 또는 지나간 것에 대해 숱하게 눈물 흘리는 시간을 보냈나 봅니다.
특히 폐가에 관한 글을 몇 번이고 되읽었습니다. ‘폐가는 자신과 함께 살던 사람의 시간을 풍장 시키듯 서서히 기운다…사람을 보듬는 방식으로.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저도 오래전에 폐가를 카메라에 담아온 적이 있습니다. 마루 짝에 쌓인 먼지, 뚫어진 창호지, 나뒹구는 가재도구들…몇 년째 들여다만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누군가 그곳에서 온전히 보냈던 시간만을 생각했다면 시인은 다가올 시간까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건 또 어떤가요.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는 글귀에도 홀렸습니다. 이뿐 아니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향기 물씬 풍기는 문장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쓸쓸하고 서글프지만 다정하고 희망적입니다. 어둠 속에서 비쳐 드는 한줄기 빛 같은 것이라 할까요.
시인은 이십 세 때 신춘문예에 응모해 이십육 세 때 등단을 했다더군요.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곡해해 실제 온몸에 시를 쓰기도 했다고요. 등단하기 전에는 시를 쓰기 위해 시가 태어나는 공간으로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직접 경험해봐야만 진실 되게 쓸 수 있다 생각한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태백의 광부를 취재하면서 현실과 닮아 있으면서도 경험해보지 않은 다른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시이며 또 다른 의미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2017년 올해의 젊은 작가상을 타기 바로 직전까지 시인은 문화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습니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부산 영도의 크레인 밑에서 자본에 맞아 죽은 노동의 곡소리를 대변한 외침이었습니다. 십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시인은 시를 짓는 일이 유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고 이 숱한 사라짐의 기록이 작품 속으로 곧잘 들어오기 때문이라는군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시인은 우리에게 함께 울자고 권유합니다.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힘이 되기 때문이라는군요. 그 말이 아니라도 읽는 내내 가슴이 젖어들었습니다. 눈물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는데 그 싹을 보았던 것일까요.
(2021.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