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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Sep 21. 2024

보이우나 Boiúna

눈을 번득이며 나를 노리고 있다. 무시무시하게 몸집이 큰 아나콘다다.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풀장의 미끄럼틀에 몸을 착 붙이고 나를 향해 한껏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아악. 잡아먹히고 말았다.


꿈에서 깨어난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진다. 뱀처럼 싸늘한 냉기와 표독한 얼굴이다. 그는 왜 내게 불같이 화를 냈을까. 처음에는 그까짓 거 무시하기로 했다. 마음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혀를 널름대며 쏟아내던 그의 독기가 온몸에 퍼져 갔다.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숨통을 조여와 꼼짝할 수 없다.


그는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언제나처럼 즉각적인 답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삼십여 년 동안 사제지간으로 지내면서 대놓고 거역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그의 요구가 내키지 않아 뭉그적거렸다. 그런 내 속내를 알아차리고 배신감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지시에 항변했다면 어땠을까. 부딪힘을 피하자고 무조건 호응할 일은 아니었다.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다고 즉시 말했다면 잠깐 불편하고 말 일이었다. 되짚어보면 내 잘못도 크다.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나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나를 몰라준 것이 원망스럽고 서운하다.


한순간 둘 사이에 크레바스가 생긴 듯 틈이 벌어졌다. 갈라진 틈새는 닿지 못할 만치 벌어졌다. 그만한 일로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관계라면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다. 결론을 내리고도 마음속에 구겨 처넣은 화가 꾸역꾸역 올라온다. 해소하지 못한 화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떠돌다 엉뚱한 곳으로 꽂혔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는 동화가 떠오른다. 땅 위로 올라온 두더지가 제 머리에 똥을 싼 범인을 찾아 곳곳을 누비는 이야기다. 두더지는 범인을 찾아 똑같이 똥을 싼 뒤 기분 좋게 땅 속으로 들어간다. 그대로 돌아갔다면 컴컴한 굴속에서 복수심에 사로잡혀 지냈을지 모른다. 동화에서처럼 내 머리에 똥 싼 그를 바로 찾아가 해명해야 했을까.


 나름 찾아낸 방법이 그림 그리기였다. 벽에 걸린 달력을 뜯어 그 위에 색연필로 꿈을 되살렸다. 녹색 바탕에 검정 얼룩무늬가 겹쳐진 몸뚱이를 색칠하고 그 위로 미끈한 비늘도 빽빽하게 덧입혔다. 앞쪽으로 벌어진 커다란 입은 빨갛게 칠했다. 그 앞에 벌벌 떨고 서 있는 나는 개미만큼 작다. 완성된 그림을 앞에 놓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색이 옅어지고 비대한 몸집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빨간 입술만 남아 둥둥 떠다닌다. 피식 웃음이 난다. 실제로 독이 없는 아나콘다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먹이를 휘감아 사망에 이르게 한다던가.


 며칠이 지난 후 그의 블로그에 한편의 글이 올라왔다. 《나는 뻔뻔하게 살기로 했다》는 데이비드 시버리의 책에서 한 대목을 인용했다. ‘어떤 사람은 괴물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회피하는 사람을 배려심 깊고 선량하다고 할 수 없다. 진짜 미덕은 착함이 아니라 뻔뻔함을 실행하는 것이다.’라는 대목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럽지만 해내야 한다. 하다 보면 복수의 허망함을 깨닫게 되어 내 안에 사랑이 싹트게 되지 않을까. 복수심이 사랑의 마음으로 화하는 기적을 나는 믿는다고.’


글을 읽으며 불끈 용기가 났다. 결국 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뻔뻔함을 실행해야 한다는 말이렷다. 정면으로 대면하려다 외면당하거나 비방을 듣는다면 또다시 상처를 입지 않을까. 두려움에 주춤 뒷걸음치다 도전을 감행했다.

 

마음을 다잡고 그를 찾았다. 굳은 표정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는 대뜸 “나를 사랑하죠?”라며 뻔뻔하게 묻는다. 부대끼느라 쪼그라진 마음에 그의 질문이 찰싹 달라붙는다. 나는 정말 그에 대한 애정이 깊어 이곳까지 왔을까. 내민 손을 잡는 순간 고약한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마존강 유역에는 보이우나(Boiúna)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보이우나는 아나콘다를 이르는 이름으로 강의 요괴라고 불리운다. 지능이 높아 사람으로 둔갑하기도 하는데 요괴에게 그림자를 빼앗기고 되찾지 못하면 죽는다고 한다. 하마터면 나도 분노라는 유혹에 잡아먹힐 뻔했다. 어쩌면 그에게 나도 아나콘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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