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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Nov 05. 2024

살구나무

골목 초입 살구나무 아래 그녀의 집이 있었다. 살구나무가 그토록 거목이 되리라고는 짐작치 못했다. 그 집에서 뒤늦게 살림을 차린 그녀는 고목에 비하면 새댁이나 다름없었다. 살구꽃 같은 수줍은 웃음을 띠고 하루에도 몇 번씩 대문을 들락거렸다. 밭을 오가는 그녀를 나는 창문에 서서 눈으로 쫓았다. 


살구나무는 제일 먼저 꽃으로 봄을 알렸다. 순식간에 터지는 하양과 분홍의 찬란한 빛이 앞산까지 화사하게 물들였다. 잎이 피고 콩알만한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나무는 가지가 보이지 않을 만치 무성해졌다. 보리가 누릇해질 즈음 열매도 연주황으로 익어갔다. 고목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고인 침을 삼키며 그녀의 집 주위를 기웃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 사이로 익은 열매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남의 골목을 차마 기웃대지 못하고 그녀에게 몇 알만 주워 달라할까 망설이던 참이었다. 말도 꺼내기 전에 살구가 싸그리 사라졌다는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 맛은 어떤지, 누가 주워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무도 열매를 단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침묵했다. 


나무 아래 매인 개가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살구殺狗. 살구꽃의 꽃말은 수줍음과 의혹. 살벌한 이름과 모호한 꽃말 뒤에 숨겨진 비밀처럼 나무 아래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살구나무는 열매를 떨구고도 여전히 푸르렀다. 무심히 서 있는 나무 곁으로 바람이 속닥거리다 지나가고 참새들이 조잘대며 몰려와 머물다 떠나갔다. 그 결에 부부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가지 사이를 뚫고 나돌았다. 


타국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그녀의 사연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서툰 우리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때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행복한 미래를 꿈꾼 적도 있었다. 화사한 웃음은 애당초 그녀의 몫이 아니었던지 예고 없이 찾아든 첫 남편과의 사별은 생을 온통 시들게 만들었다.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다시 사람이었다. 빈손에 혼자가 된 그녀에게 그늘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사람은 낯선 나라의 남자였다. 


말수가 없는 남자는 과묵하고 건강해 보였다. 모아둔 재산이 없다한들 집 있고, 땅 있고, 기술이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남자와의 인연이 운명이라 믿고 싶었다. 딱 한 번의 만남 이후 그녀는 톤레삽 호수 주변 수상가옥을 떠나왔다. 물 설고 말 선 땅은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작 남자와도 무엇 하나 맞는 것이 없었다. 통하지 않은 언어보다 둘 사이를 더욱 멀게 만든 것은 도통 내보이지 않은 남자의 마음이었다.


이왕지사 인연을 맺었으니 견디다보면 나아질까. 터지는 한숨을 나이테처럼 몸 안에 새기고 또 새겼다. 쌓인 생채기는 살구씨를 삼킨 것처럼 독성을 퍼트려 그녀를 병들게 만들었다. 망가진 몸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앞날을 기약할 수도 없었다. 십여 년이 넘도록 나무는 그녀의 사연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지혜로운 어른들은 부부 일은 모르쇠 하는 것이 상책이라 했다. 후드득 살구가 떨어질 때 사는 일마저 포기하고 싶다던 그녀의 말 때문에 나는 안달이 났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살구나무에 올라 안을 내려다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체했을 때 살구씨가 특효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들 사이에 얹힌 감정이 씻겨져 나갈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남자의 따뜻한 한마디 말이었다. 


어른들은 다음 해에도 살구꽃이 다투어 피어날 것이라 했다. 살다보면 부부 사이에도 정이 돋아날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에 나는 의혹이 일었다.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남자와, 우리는 이제 그른 것 같다는 여자에게서 희망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로에게 닿지 못한 마음을 견뎌내는 그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구나무는 오늘도 독성이 든 씨앗을 품고 있는 두 사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웃인 나 역시도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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