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

by 동백

얼척없는 일이다. 도시에 사는 지인이 우리 집 가까이에 사투리 박물관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곳이라면 마을 단체 회식을 갈 때마다 지나쳤던 길목이다. 유심히 보니 음식점과 삼분 거리에 있는 박물관 이층에 커다란 간판까지 떡하니 걸려 있다. ‘병영’에 갈 때면 설성 막걸리와 연탄불고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만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곁에 있는 건물은 건더꿀로 보고 지났다.


‘와보랑께 박물관’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빠진 주인장이 삼십 년 전 문을 열었단다. 진입로부터 사투리가 적힌 나무 팻말이 줄줄이 서 있다. 오래되어 희끄무레하게 흐려진 글자도 있고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말도 여럿이다. 안에는 무슨 말을 어떻게 진열해 놓았을까. 호기심이 당겨 서둘러 전시관 문을 밀었다.

벽면에 사투리로 그렸다는 추상화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숨은 그림 찾듯 들여다봐도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사투리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는 말일까. 작품을 해독하려면 한나절은 걸릴 성싶어 그림 아래 감춰 둔 제목을 들추었다. 아무것도 아닌디, 우짜까이, 그란다고 그래부러야, 맬갑시, 우짜든지… 답을 보고 나서야 그림 속에 녹아 있던 사투리의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언어에 서린 온기가 물감처럼 번져 온다. ‘맬갑시’는 객지로 떠도는 남편을 대신해 해초 보따리를 이고 서울을 오르내리던 큰엄마가 잘 쓰던 말이다. 친정집 김 어장을 밑천 삼아 자식들을 건사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리라. 완행열차에 시달려 오는 날이면 우리 집 아랫목을 차지하고 앓아누웠다. 아버지는 쌍둥이 형을 대신해 형수 병구완을 극진히 했다. 큰엄마의 맬갑시는 녹록치 못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자기 최면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한 골목에 살던 맹암 아짐의 ‘우짜까이’도 들리는 듯하다. 젊은 나이에 혼자 된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종종거렸다. 마실을 오면 연속극을 보다가 시도 때도 없이 치마를 끌어다 눈물을 찍어내곤 했다. 웃다 우는 아짐 표정이 더 드라마틱해 보였다.


어머니가 늘상 하던 말은 ‘우짜든지 잘 지내라’였다. 어린 나이에 엄마 품을 떠나게 된 나는 익숙한 것과의 이별에서 오는 충격보다 사투리가 더 큰 걸림돌이었다. 어쩌다 내뱉는 한마디에 아이들이 까르륵거렸다. 그 웃음소리에 내 존재가 전부 부인당하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잘 지내는 길은 우짜든지 말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었다.


한 해가 지나자 서울말은 완벽하게 구사했지만 방학이 되면 또다시 사투리에 노출되었다. 그렇다고 전처럼 줄줄 나오지는 않았다. 도시 말도 아니고 사투리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씨 때문에 고향을 떠난 적 없는 토박이들 앞에서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 카멜레온처럼 위장을 한다 한들 어느 쪽에도 낄 수 없는 처지가 된 나는 모호해진 정서를 감추기 위해 애늙은이처럼 굴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어른스럽다 칭찬했다.


나는 도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태생이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고 서울말이 입에 익어 문제 될 건 없었다. 집에 가는 횟수도 줄이고 부모와의 사이마저 거리를 두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도시 사람이 되어 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토 말이 들려오면 귀가 솔깃해지고 감정이 요동쳤다. 나의 DNA에 새겨진 언어를 거부하기란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던 하이데거에게 인간의 주된 문제는 고향 상실이었다.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는 고향이나 집과도 같은 장소를 상실했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떠도는 존재인 인간에게 바로 ‘언어’가 존재를 초연히 내맡길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준다고 했다. 나에게도 존재를 맡길 처소가 절실했음일까.


몇 해 전 고향에 물리적인 집을 마련했다. 내 언어의 이중생활이 끝나 갈 무렵 시작된 새로운 이중생활은 고향 강진과 수도권의 집을 오르내리는 일이다. 어쩌면 삶은 예측이나 논리와는 무관한 ‘괜히’라는 의미의 ‘맬갑시’와 누군가에게 ‘아무쪼록’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바람을 담은 ‘우짜든지’ 사이를 무시로 넘나드는 것인지 모른다.


이곳에선 새벽이슬이 가시기도 전 울려 퍼지는 방송 소리에 잠이 깬다. 에헴… 헛기침을 한 후 나락 수매니 거름 배당, 마을잔치 소식을 전하는 이장님 말씨가 구들장 아랫목처럼 따숩다. 해가 피어오르면 마을회관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나면 화투판이 벌어지는데 날것의 언어들이 활개를 친다. “아따 무담시 이놈을 내나가꼬 싸불구마이.”라고 내뱉는 한마디에 “아짐, 된똥 한번 묵직하게 더 싸부씨요.”라며 호탕하게 맞받는다. 여기저기서 싸대는 물캐똥 같은 걸쭉한 말들을 내 안에 사투리 유전자가 즉각적으로 해독한다. 기웃대는 것만으로도 갈증 난 혀가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살아 꿈틀대는 언어가 사방에 걸려 있는 이곳이 내게는 와보랑께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관람을 마치고 회관 문턱을 넘어서는 등 뒤로 투박한 목소리가 따라온다.

“내일도 또 와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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