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때 그 순간의 아찔함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조지아주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학교 안에 들어와 있는 Chick Fil A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할 때였다. 한국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패스트푸드점인데 우리 대학교 졸업생이 Chick Fil A 창업주라서 학교 식당 안에 이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다. 패스트푸드점 중에서는 단연 인기 일등, 가격도 맥도널드나 버거킹보다 조금은 더 비쌌었다.
대학원을 다니며 Chick Fil A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나의 8개의 직업 중 한 개였다. 처음에 Chick Fil A에서 주어진 나의 일은 부엌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거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햄버거를 만들고 영업이 끝나면 설거지를 했어야 했다. 몇 달이 지나자 부엌에서 벗어나 캐시어를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됐는데 정확히 포지션 이름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부엌에서 만들어주는 햄버거를 캐시어에게 전달하고 음료수를 채워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나서 나는 캐시어로 승격을 했다.
학교 수업에서 배우는 것보다 실전에서 배우는 영어가 더 도움이 많이 되었고 미국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고 돈도 버는 일석 이조, 삼조의 정말 꿀 잡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손님에게 건네줄 음료수를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음료수가 바닥에 산산이 부서져 쏟아지던 순간 나는
"쉿"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깜짝 놀라 비명처럼 나온 소리였는데..
그 순간 Chick Fil A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외치는 거였다.
"Jasmine! you can curse??"
음료수를 떨어뜨린 나보다 10배는 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나를 둘러싸고 재밌다는 듯 연신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Curse? 욕이라고? 내가 욕을 했다고?
이 날 안 사실인데 내가 외친 "쉿"은 직역하면 "똥"이지만 의역하면 씨 x (?) 정도쯤 되는 욕이었다.
한국에서도 욕이라곤 해본 적 도 없는 내가 미국에서 그것도 일자리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욕을 한 거였다.
항상 sweet 한 상냥한 이미지의 조그만 동양 아이가 고객 앞에서 욕을 한, 정말 커다란 사건을 목격했다는 듯 친구들은 계속 신기한 듯 나를 쳐다봤다.
이 쉿을 나에게 알려준 건 다름 아닌 나의 룸메이트 다나였다. 알려준 게 아니라 내가 그냥 배운 거였다.
그녀는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짜증이 날 때마다 쉿을 남발했고 그걸 매일 들었던 나도 자연스레 그 말버릇을 배운 것이었는데 그 말뜻이 뭔지도 몰랐던 거였다.
나는 원래 욕을 싫어하고 할 줄도 모른다.
그날 내 얼굴은 아마 빨간 홍당무보다 더 빨갰으리라 짐작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단어를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달라스에 이사를 오고 삼성에서 일할 때 후배들이 나에게 불평을 했었던 적이 있다. 신입들이 들어와서 친하게 지냈었는데 몇 달이 지나서 회식자리에서 자기들이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며 하소연을 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욕을 했는데 내가 회사에서 욕을 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쳤다는 거다.
"회사에서 욕을 쓰면 되겠어? 다시는 욕하는 일이 없도록 해" 하면서 내 흉내를 내며 재현을 했다.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욕도 못하냐며 너무 스트레스받는다며 나를 원망했었다고 한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자신들은 정말 힘들었다며 진지하게 얘기하는 후배들이 너무 웃겨서 냉소를 금치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회사에서 당연히 욕을 하면 안 되지 했다.
내 후배들은 이런 나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욕인 줄도 모르고 욕을 했던 나의 흑역사가 있었다는 건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
쉿이 욕이란 걸 알고 나서 몇 달이 지나 대학원생 과 친구랑 회사 견학을 간 날이 있었다. 타이완에서 온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운전을 했었는데 운전 중에 길을 잘못 들어갔을 때 이 친구가
"슛"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 또 턴을 잘못 돌자 또 "슛" 하는 거였다. 이 친구의 말버릇도 슛, 슛이었는데 나는 맘 속으로
'저런.. 이 친구는 쉿 발음도 못해서 슛, 슛 하는구나 쯧쯧'
하고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이 "슛"이 "쉿"을 순화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쉿이라는 욕 대신 귀엽게 슛이라고 하는 거였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꿎은 친구의 발음을 탓했으니...
나도 이제 쉿은 외치지 않지만 가끔 슛은 외친다.
영어를 몰라서, 문화를 몰라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고 당황을 하고 의도치 않은 개그를 남발했던 나의 초창기 미국 시절. 지금 되돌아보면 다 즐거운 추억이고 흑역사이지만 그 흑역사들이 모여서 조금은 더 단단해진 내가 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