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피아노 썸머 캠프에서 6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아들이 없는 집은 피아노 소리도 끊겼고, 다만, 가끔 내가 아들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유투브로 보거나 캠프에서 보내준 링크로 아들의 공연 실황을 볼 때를 제외하곤. 아들의 비행기 출발 시간 5분 전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미안한데…
순간 내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약 3개월 전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나에게 전화해서 꺼낸 첫마디가 “엄마, 미안한데..”였다. 난 가슴을 가다듬으며 아들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엄마, 비행기를 놓쳤어...
순간, 난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아들의 억울한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전화기에 비행기 안내가 잘못 떠서 다른 곳에 있다가 게이트에 갔을 때는 1분이 지났다며 항공사 직원이 자신의 티켓을 다른 사람한테 줬다며 문이 열려 있었는데도 못 들어가게 했다는 거다.
이미 혼자 여름 캠프도 몇 번이나 갔다 오고 여행 베테랑이 된 아들이 비행기를 놓치다니…
자신에게 난 화 반, 항공사 직원에게 난 화 반으로 격양된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아들이 무사함에 화도 나지 않은 채 아들에게 다음 비행 편을 알아보라며 일단 전화를 끊고 American Airline 웹페이지에 들어가서 폭풍 검색을 했지만 클리블랜드에서 달라스로 오는 비행 편은 아들이 놓친 비행기가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오전 7시 비행기가 있어서 다시 피아노 선생님 댁에 가서 신세를 져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엔 180도 톤이 달라진 해맑고 유쾌한 톤의 목소리로…
엄마!! 해결됐어! 비행기 티켓 해줬어. 샬롯에 가서 한번 갈아타고 달라스 오면 새벽 12시 20분 도착이래.
2시간이면 올 거리를 6시간이나 걸려서 그것도 경유를 해서 오는 게 그리 신날 일인지, 아들은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들떠 있었다. 고생은 자신의 몫이니 뭐라고 내가 할 말은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아들 모습에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렇게 경유를 해서 6시간 걸려서 올 거였다면 엄청 화가 났을 텐데.. 참 사람이란 단순한 건지, 처한 상황에 따라 똑같은 사건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짜증거리가 되기도 하니 모든 게 마음먹기 마련인가 보다.
도착 기념으로 식당에서 삼겹살 파티의 계획은 무산됐고 샬롯에서 잘 갈아타고 와야 할 텐데 하고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해서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아들은 이제 트라우마에 걸렸다며 절대 안 놓칠 거라고 장담을 했고 새로 발부받은 티켓을 사진으로 보내왔다.
어느덧 도착시간이 가까워져 갔고 아들이 놓친 비행기 편으로 왔을 짐을 찾으러 조금 일찍 출발을 했다. 아이오와주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 딸 쏘피아도 와 있어서 함께 남편과 쏘피아 나 이렇게 셋이서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쏘피아의 아이디어로 우리는 휴대폰에 형광 배너 Welcome back DJ! 도 준비해 갔다.
밤 12시인데도 90도를 넘는 무더운 공기를 뚫고 우리는 공항 안으로 들어갔고 눈썹 밑으로 한참 내려온 덥수룩한 머리를 한 DJ 앞으로 휴대폰 속 웰컵 배너를 흔들며 다가가서 포옹을 했다.
혹시 몰라서 가볼까 했던 식당은 검색을 해보니 이미 문을 닫았고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들은 캠프에서 고백받은 이야기, 텍사스 출신이 4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같은 고등학교 후배인데 평소에 맘이 들지 않았지만 이번 캠프를 통해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 후배는 학교에서 보내준 라이브를 볼 수 있는 링크에서 아들 차례에서 브라보를 외치며 유난히 팬심을 보이던 앞줄의 남자아이였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엔지니어 아저씨랑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아저씨는 아프리카에서 4년 전에 텍사스로 왔는데 4개 국어를 한다고 했다. 그 아저씨의 아버지는 10개 국어를 하는데 아프리카에서는 한 나라에서도 수십 개의 다른 언어를 쓴다고 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아들에게 응원한다며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해줬는데 정말 너무 좋은 아저씨라며 엄마가 그 아저씨를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 그 아저씨에 대해 글로 쓸 수 있으니까 라면서.
집에 오자마자 피아노 곁으로 달려가던 아들은 아빠한테 얻은 하얀 보드에다가 자기가 연습해야 할 곡들과 목표들을 빼곡히 적고는 그 옆에다가 체크 마크를 할 거라며 빈칸을 그렸다.
작년 한 해 슬럼프를 겪은 아들은 오블린으로 이사 가신 피아노 선생님께 잔소리 않은 잔소리를 매일 아침 한 시간 동안 들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들이 정말 자신을 생각하고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란 걸 잘 아는 아들이었기에 선생님께 증명해야 한다며 피아노에 대한 각오가 대단해 보였다.
베토벤, 리스트, 바하, 쇼팽의 이름 밑에 빼곡히 써 내려간 연습 페이지들에 어제도 오늘도 체크 마크는 빼곡히 채워졌다. 대학 입시 오디션의 전단계인 pre screening 녹음까지는 이제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오락을 하자며 전화 온 베프의 전화에 노를 하느라 이십 분 넘게 친구를 어르고 달래는 아들의 모습에 우리 아들 파이팅하고 눈짓을 해 보였다.
12시가 넘은 시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돌아온 아들은 미처 체크를 하지 못한 쇼팽 연습곡을 자고 있을 누나를 생각해 해드폰을 끼고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