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변절했습니다.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비린 것은 모조리. 곱창은 좋지만 대창은 싫다.
브로콜리, 가지, 콩자반, 콩밥, 눈알이 보이는 큰 멸치도 닭발도 끔찍하다.
그러다 불쑥 ‘편식하지 말라며’ 엄마의 매서운 손이 등짝을 찰싹 때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코를 비틀어 쥔 채 먹어 버릴 수는 있었다. 숙련을 거듭한 결과 밥 속에 있는 까만 콩은 한 입에 여섯 개씩이나 삼킬 수도 있었다.
정말 못 먹는 음식은 오이 그리고 토마토였다.
햄버거 속 피클 두어 개는 종이포장지 속에 몰래 쏙 버려둔다.
샌드위치는 마요네즈부터 무수한 오이조각이 있으므로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김밥은 긴 오이 줄기를 몽땅 빼고 먹는다.
난이도가 상당한 음식은 바로 짜장면과 냉면이다.
큰 대야그릇에 이리저리 퍼져있는 오이들을 하나씩 건질 때마다 한 소리도 함께 듣는다.
다 뽑아낸 오이 뭉치는 둘 곳이 마땅치 않다.
하루는 오이와 씨름하고 짜장면을 깨작거리는 딸내미가 답답했던지, 엄마가 불러 세웠다.
“먹어.”
나는 결단코 못 먹겠다고 반항을 했다. 오이는 눈을 감아도 으석거리는 촉감이 생생하고, 코를 비틀어 쥐어도 삼키고 나면 올라오는 그 산뜻한 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먹어. 언제까지 그렇게 밖에서도 보기 싫게 그럴 거야? 먹어보면 상상한 거랑 다를 수 있잖아.”
이해한다. 나는 오이가 싫었고, 내 기억이 있는 한 오이를 먹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먹기 싫었다. 오이는 똑똑 썰어서 얼굴에 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먹어.”
세 번째였다. 다음은 등 짝일 테다.
반항심을 한껏 품고 오이를 해치웠다.
아니 해치우지 못했다.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다 게워내고 말았다.
아마 오이를 못 먹어서라기보다 그 상황이 싫어서였을 것이다.
나름 꾀를 부린다고 오이를 씹지는 않았는데 토를 해버려 스스로도 놀랐고, 엄마는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며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 뒤로는, 짜장면과 콩국수와 냉면의 오이는 모조리 아빠 몫으로 가게 되었다. 오이 거부가 합법이 되었다.
십 수년. 내 정체성은 오이를 못 먹는 사람이었다.
사회적 기능을 하느라 햄버거의 피클 정도는 삼킬 수 있게 되었다. 냉면의 오이는 궁색하게 한 조각 씩 버릴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 반은 삼키고 반은 티 안 나게 그릇에 남겨두었다.
또 수년이 흘렀다. 여전히 오이를 싫어했다. 먹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오싫모라는 내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명란구이라는 술안주를 먹으면서였다. 소태처럼 짠 명란구이에 오이를 곁들이지 않는다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나의 첫 오이는 구세주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오이를 싫어하는데.
몇십 년 동안이나 오이를 싫어했는데 먹을 수 있다니. 이건 내가 아니었다.
오이를 먹을 수 있으면서도 거리를 뒀다.
그리고 며칠 전 점심, 오이와 쌈장 그리고 당근조각이 함께 나왔다.
점심이 끝날 때까지 째려보다가 두 조각을 들고 나왔다.
오후 3시. 생오이를 한 조각 먹었다.
먹었다.
나는 오이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기로 했다.
토싫모도 있나?
이젠 오싫모가 아니니까, 토마토마라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토해버린 기억을 가지고
토실모로 이적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