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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밍 Jul 26. 2017

불안한 죽음의 문턱
너머로 한 걸음씩.

죽음의 불안과 애착유형, 그리고 실존주의 심리학



 어렸을 때부터 죽음은 내게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덟 살 때 처음 맞닥뜨린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연이어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죽음들. 가족, 친구, 선생님 할 것 없이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순식간에 찾아오고는 했다. ‘나처럼 어린 나이에 이렇게 장례식을 많이 가 본 사람도 없겠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나는 점점 사람을, 그리고 이 세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넘치는 사랑을 듬뿍 줘봤자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고야 말 사람들이니까. 지금의 이 행복과 웃음도 먼 훗날에는 다 물거품이 될 테니까.

      

 이런 비관적인 사고방식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눈 감는 그 순간까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오랜 꿈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믿기보다 의심하고, 그들을 사랑하기보다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먼 미래에 그들이 떠난 뒤 홀로 남겨질 내 모습이 무서워서, 그래서 그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어딘가에 혼자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나는 날이 갈수록 혼자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옷을 사는 일들에 익숙해져만 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발적 아웃사이더(outsider)’의 삶을 택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내 주위에는 사람들이 복작복작했다. 실제로도 혼자 지내는 시간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하는 시간이 월등히 더 많았다. 다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진짜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표하고 사랑을 주려해도, 나는 마음속에 그어 놓은 선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선을 넘으려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느끼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나는 다시는, 가족도, 친구도.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정한 선을 넘지 말아줘. 


 연인관계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내가 좋다며 다가오는 숱한 사람들이 있었고, 짧은 연애를 수차례 했다. 하지만 백 일을 채 넘긴 사람이 없었다. 나는 금방 그 사람들을 피했고, 그들의 사랑이 부담스러웠고, 또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될 내 모습이 무서웠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눈치채기라도 했던 걸까. 나를 스쳤던 그 사람들 역시 나를 쉽게 떠나 또 다른 누군가와 쉽게 사랑에 빠졌다.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상관없다는 것처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살아왔던 내가, 사랑을 가장 큰 적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된 것은 이처럼 켜켜이 쌓인 상처들 틈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진물이 흘러나오는 상처를 덮어두기만 했던 나였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사람을 믿지 않으려, 사랑하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다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심장이 없는 인공지능 로봇들처럼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머리는 가만히 이성의 끈을 잡으려고 날뛰어도, 내 마음은 금세 또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고 애써 봐도,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내 마음속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아 버린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피해 달아나려던 나의 노력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내가 점점 더 ‘완전한 사랑’에 목매며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마치 모든 것이 정해진 순서였던 것처럼. 나는 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답장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순식간에 불안해졌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지루하거나 심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내 곁을 갑자기 떠나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고는 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말해주기를 또 증명해주기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몰입형 애착 유형 심리 검사 결과표의 진단 역시 정확했다. 몰입형 애착 유형이란 사람들과의 애착 관계에서 불안한 행동 전략을 더 많이 보이는 유형으로, 대인관계에 집착하며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결과를 받아 든 나는 의사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들은 환자라도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머릿속으로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두려움이, 형체를 가진 실체가 되어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찾자면, 불안과 회피가 모두 높은 두려움형 애착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검사 결과는 순식간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그 감정의 홍수 속에서 벗어 나오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 나는 나의 이러한 점들을 어떻게 마주 보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더 행복하고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건지. 비슷한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탓에 당장의 강의 내용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때마침, 참 신기하게도. 그날 교수님께서는 죽음의 문제를 깊게 파고들었던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 같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삶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살고자 하는 마음의 분투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몸에 해로운 것들을 일삼거나 정신적으로 병리적인 증상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죽음을 향한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그러한 공포를 직면하고 앞으로의 삶을 마주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익숙하게 나를 따라다녔던 죽음과 무의미에 대한 불안함, 이것들이 나를 덥석 집어삼키지 않도록. 내 안에 너무 깊게 패인 상처들이 더 이상 나를 아프게 만들지 않도록. 그 곪아있는 것들을 차분히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 동시에 내가 평생을 고민하며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삶을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 순간이라도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열쇠도 없이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온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아낌없이 또 남김없이 순간의 행복을 온몸으로 누리며 나아갈 것. 하지만 그러면서도 타인의 관심과 보살핌에 전전긍긍 목매는 것이 아니라, 오롯한 나 자신으로서의 자리를 굳게 지킬 것. 이러한 다짐들을 내 안에 소중히 새겼다. 이것이 이번 학기, 아니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변화이자 출발점이다. 드디어 나는 내 눈 앞의 죽음이 아니라 내 눈 앞의 반짝이는 날들을 위해서 한 걸음씩 씩씩하게 내딛을 준비가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주 환하게 빛나고 있을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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