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도록 푸를 우리들을 위해

이혜정, <대한민국의 시험>을 읽고

by 달밍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참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그날> 속 한 구절이다. 모두 병들어 아파하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사회. 아픔과 고통에 둔감해져버린 불감증 환자라도 되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잘만 돌아가는 세상.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70년대 말, 8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벌써 삼십 년이 훌쩍 지나버린 2017년의 대한민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지금의 우리는 ‘모두가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았’던 시기를 지나온 지 오래이다. 대신 우리들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지 못한 채 처절하게 아파하고 있다. 난치(難治)를 넘어서 불치(不治)라 느껴질 정도로, 오래도록 우리를 괴롭혀온 이 아픔의 가장 큰 주범은 바로 우리의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나름대로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였다. 하지만 이 원대한 목표도 입시라는 현실의 관문 앞에서는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렇게 시작된 수능 중심의 수업 속에서 어느샌가 나는 시험 불안에 시달리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시험 볼 생각을 하면 속이 울렁거렸고, 시험 직전에는 늘 배가 아파왔다. 든든히 먹어야 기운을 내서 공부를 할 텐데. 매슥거리는 속에 무작정 음식을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약해진 체력과 나빠지는 건강 사이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무자비한 평가 방식과 치열한 경쟁은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0.1점 차이로 등급이 훅훅 갈렸고, 등급의 차이는 곧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래서 결국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있는 주석까지 달달 외워야만 했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약해진 몸과 반비례하여 튼튼해져버린 정신력 덕분인지, 나는 살얼음판과도 같던 입시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외운 것을 종이 위에 그대로 풀어내기만 했던 나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문제 풀이 훈련으로 어떤 문제이든지 척척 풀어낼 수 있었던 나는, 과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던 것일까? 여전히 나는 오랜 주입식 공부의 훈련 덕에 정제되어있는 지식을 암기하고 그것을 나의 말로 그럴듯하게 바꾸어 쓰는 데에는 능숙하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나의 의견을 정리해서 조리 있게 말하는 일에는 영 자신이 없다. 늘 정해진 답, 모두가 끄덕일 수 있는 답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은 나의 머릿속에서 의견이 솟아나는 과정을 방해하고,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욕구를 점점 사라지게 만든다. 나는 원하던 대학에 와서도, 좋은 학점을 받는 편이지만 이런 내 스스로를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늘 물음표가 따라온다.


암기력 테스트와도 다름없는 시험이 우리에게 남긴 부작용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곤 했다. 나에게는 별 의미 없는 수업이라고 여겨지는 강의를 들을 때에도, 교재의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필기를 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 친구의 학점이 좋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 번은 우연한 기회로 그 친구와 함께 밥을 해 먹을 일이 생겼다. 그런데 그 친구는 국수를 하려면 냄비 안에 물부터 받아서 끓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물도 받지 않은 텅 빈 냄비에 딱딱한 소면을 덩그러니 넣어 놓고는, ‘어쩌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 친구의 눈빛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이때의 일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와 한동안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수 끓이는 법을 알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도 스파게티를 직접 만들어서 먹어본 적은 없으니까. 단지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나 하는 강한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일 텐데, 지금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부하는 기계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너는 일단 공부만 하렴, 네가 공부만 잘 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어른들과, 그들이 그렇게 말하게끔 일조한 사회 분위기와, 심지어는 이 분위기를 공고히 유지하도록 부추겨온 교육 체계까지. 어느 것 하나 빠져서는 안 될 이 멋진 조합의 결과물이 바로 시험공부밖에 잘하는 게 없는 모범생인 것이다.


몇 시간이든 가만히 책상에 앉아 교재에 담긴 내용을 달달 외울 수 있는 무거운 엉덩이만 있다면 좋은 성적을 받는 모범생이 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교사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퍼붓고, 학생은 덩그러니 앉은 채 열심히 주어진 지식을 받아먹도록 만드는 지금의 평가 구조. 이러한 체계 내에서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아니, 더 이상 알고 싶거나 궁금한 게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런 질문과 호기심이 생겨나는 순간 다른 친구들보다 하나라도 더 외워야만 하는 경기에서 금세 낙오자가 되어버리니까. 인생의 가장 젊은 나이를 가장 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병들어버린 시험의 체계 속에서 모범생이 되기 위한 치열한 경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병든 시험의 문제는 비단 인간으로서의 기초적인 생활력이나 지식을 새로이 만들어내고 통합하는 창조적인 능력을 저하시킨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지금의 시험 체계가 오로지 ‘머리’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길러낼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소위 엘리트 집단에서 몇 년을 지내온 내가 가장 섬뜩함을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순 지식의 암기만이 우선시 되는 기존의 평가 방식 아래에서는, 감정이 배제되고 이성만 남아버린 인간을 만들 가능성이 정말로 높다. 이렇게 머리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인재를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과 이야기에 공감하기 힘들어한다. 절대적인 답을 모조리 알고 있는 스스로가 절대적인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타인과 이 세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과목이 무엇일까? 나는 국어, 그중에서도 문학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나의 삶만큼이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누군가의 삶 속을 거닐며, 그 안에서 나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이 총체적인 과정은 다른 어떠한 교과 영역보다도 아이들의 감수성과 공감력을 길러주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실상은 타 교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그라미 세모를 비롯한 각종 기호들로 작품을 온통 도식화하며 난도질하고, 밑줄을 긋고, 받아 적은 내용을 무작정 암기한다. 모든 작품의 주제와 표현방식이 깔끔하게 요약·정리된 각종 문제집이 넘쳐나고, 그 속에 축약된 내용들을 충실히 외워간다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압축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자유롭고 풍부한 해석과 감상이 서 있을 자리는 점점 위태로워진다.


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각종 문학 작품의 해설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부족하고 어설퍼 보이더라도 오롯이 자신의 시선이 녹아있는 한 편의 감상문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한 편의 글이, 어떤 문장 하나가,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하나의 단어와 음절이 주는 모든 떨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저기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나의 심장을 미친 듯이 쿵쾅거리게 만드는, 그래서 읽는 순간 나의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리는 그런 작품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침내 죽을 때까지 가져가고 싶은 문장들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 짜릿하고 아득한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다른 사람의 삶과 이야기 안에서 나날이 스스로의 세계를 넓혀나갈 수 있도록, 또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충돌하여 그것이 매일같이 다른 모양의 울림을 빚어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단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고 단 하루도 섣부르게 단언할 수 없는 우리의 빛나는 매일매일이 지니는 가치를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수업을 통해서 찾아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과 같은 교육 시스템 아래에서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수능에는 절대 나오지 않을 시 한 편을 꺼내 드는 순간, 의아함이 섞인 아이들의 눈빛이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들 학부모들의 만류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과서 위에 받아 적은 지식을 암기하고 무작정 머릿속에 집어넣는 방식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다. 놀랍도록 굳건한 위상을 지키고 있는 ‘정답’의 테두리 속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사고를 자꾸만 가두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판 위에서 아이들 스스로가 정해진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이들 각자의 몸짓과 생각과 느낌을 무한대로 펼칠 수 있는 교육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어쩌면 너무나 생소하고 낯설어서 자꾸만 의심과 불안함이 고개를 치켜들겠지만,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변화로의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교사는 더 이상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들이 각자의 세계를 넓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어차피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해야만 하는 공부를 아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 시작에의 물꼬를 터주는 것이 바로 우리 교사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정답을 위해 수업하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사가 아니라. 다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고 그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고 키워줄 수 있는 교사. 머지않아 찾아올 우리의 변화된 미래에는 이러한 교사들이 필요하다. 훌륭한 교사 한 명이 세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좋은 교사라면 나의 아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육이 아닌 교육, 기억함이 아닌 철학함. 이것이 우리가, 교사가, 아이들이, 2017년의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이자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우리 집 바로 앞에는 ‘흰구름길 구간’이라는 예쁜 이름의 북한산 둘레길이 있다. 나는 그 길을 가만히 걸으며 조용한 나무들 사이에서 취하는 휴식을 참 좋아한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마음이 복잡하거나, 해야 할 일이 나를 너무도 무겁게 짓눌러 머리가 꽉 막혀버린 것 같을 때. 그럴 때마다 사방을 꽉 채운 커다란 나무들 틈에서 짧은 산책을 한다. 가만히 기대어 서서 나무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불쑥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어떤 나무도 같은 키와 같은 크기, 같은 줄기와 가지와 이파리의 모양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어떤 나무는 키가 크고 어떤 나무는 키가 작고. 어떤 나무는 잎이 많지만 어떤 나무는 그렇지 않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것도, 구불구불 제멋대로 춤을 추는 나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제각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넌 틀렸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나무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다. 때로는 그 가지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멋진 풍경화를 그려내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모습과 마음과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숲 속의 나무가 그렇듯이, 우리에게는 우리가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모습 혹은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아이들도 자신만이 지닌 재능과 능력과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며 살아가야 할 자격이 충분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행복한 삶으로의 방향을 이끄는 것이 바로 우리 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험 앞에서 불안함에 떠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지를, 잎을 마음껏 뻗어나가며 또 그 속에서 함께 어울리며 눈부시게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도록. 지금의 나는, 우리는,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할까 고민이 깊어만 가는 여름밤이다. 그 놀라운 변화의 나날이 머지않았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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