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했을까
01.
12월의 첫째주 토요일. 서울하늘은 뿌연 먼지에 덮였고, 초겨울의 신선함 대신에 매캐한 바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현은 면접용 정장을 입고는 거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넥타이를 고쳐 맸다. 이어서 그는 얼굴에 힘을 주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려 했다. 하지만 눈이 미처 따라주지 않았다.
강남역의 어느 호텔. 이현은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어떤 감정들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빠져나간 듯한 무표정. 이현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이 표정으로 가면 안 되는데.'
결혼식장은 호텔 최상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결혼식장안으로부터 피아노의 선율과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대학교에서 만난 이현의 첫사랑인 신지예의 결혼식 날이었다.
신부 대기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밝게 웃고 있는 얼굴. 이현의 눈에는 대학때 처음봤던 지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현은 먼저 다가가서 축하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그저 먼 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만 봤다.
"현아! 오랜만에 본다."
"응. 그래. 오랜만이네."
"저기 빈 자리가 있네."
이현은 대학동기에게 이끌려 지예와 인사를 할 기회를 놓치고, 바로 결혼식장 안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연이어 결혼식에 도착한 대학 동아리 선후배와 동기들이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 명함을 돌렸다.
“현아, 넌 요즘 뭐 해?”
“그냥… 뭐 좀 준비하느라...”
이현은 대학 동기에게 말끝을 흐린 채 대답을 했다. 그는 머쓱해서 앞에 놓인 와인잔 속에 비친 자신의 희미한 얼굴을 바라봤다.
"학교 다닐 때 현이가 글은 참 잘 썼는데.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고."
"그러게. 그런데 아직도 소설 써?"
눈치가 없는 동기들이 이현에게 또다시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응. 쓰고는 있는데... 아직도 보여줄 건 없네."
이현은 집에서 반복해서 연습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웃는 척을 했다.
'아직도? 그러게. 왜 난 아직도 제자리일까?'
이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이현은 대학 동아리 사람들과 급히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결혼식장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회색빛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선배. 왔네요. 고마워요."
이현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지예와 남편.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응. 안녕. 결혼 축하해."
이현은 수차례 안팎으로 연습했던 말과 어색한 미소를 다시 내보였다.
"선배. 잘 지냈지?"
"응. 그럼 잘 지내지. 정말 축하해.난 일이 있어서 결혼식은 다 못 보고먼저 가봐야 해서."
이현은 그렇게 지예와 그녀의 남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급히 자리를 떴다. 호텔을 빠져나오자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졌다. 이현은 그녀와의 지나간 인연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날 첫 눈만 내리지 않았어도.'
대학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던 이현과 지혜. 어느날 대학 동아리 방에 이현의 이름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남겨져 있었다.
"오랫동안 선배를 지켜봐 왔어요. 12월 첫째주 토요일 아침 9시. 청량리역에서 만나요."
편지 내용은 타이핑되어 있어 누가 이현에게 남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 녀석들이 장난쳤나? 나한테 관심 가질만한 여자 후배는 없는데. 나가 보면 알겠지.'
약속한 토요일. 청량리역으로 나온 사람이 바로 신지예였다.
"저랑 춘천에 갔다 오지 않을래요? 경춘선 타고?"
지예는 이현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었다.
'왜 나한테 이런 관심을?'
사실 그 순간까지도 이현은 지예를 성격좋은 동아리 후배 중 한 명으로생각했지 이성으로 어떤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평소 이현 자신이 활발한 성격도 아니어서 지예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경춘선을 타고 서울과 춘천을 오고 가는 내내 지예는 어색한 분위기로 힘들어하는 이현에게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애써가면서 했었다.
"와! 첫 눈이 오네요."
춘천에서 닭갈비를 먹고, 서울로 되돌아오는 중간쯤. 창 밖을 보며 지예가 말했다. 이현이 그녀의 말에 창 밖을 바라보자 거짓말처럼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이현이 지예와 사귀게 된 것은 그 날 이후에도 얼어있는 바닥에 눈이 쌓여 따뜻하게 덮듯이 지예가 먼저 이현에게 조금씩 다가와 그의 마음을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함께 했던 이현과 지예. 항상 긍정적이고 계획적이던 그녀가 먼저 졸업과 취업을 했다. 하지만 이현은 보이지 않는 늪에 빠진듯이 글쓰기도 취업도 무엇하나 못하고 방황하는 날이 늘어만 갔다.
"우리 이대로 더는 안 되겠어."
지예는 이현에게 다가올 때처럼 먼저 조금씩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현은 자연스럽게 그런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겨울이 지나면 쌓인 눈이 녹듯이. 우리가 헤어지게 된 건 내가 지예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