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내가 잃어버린 것은?
02.
대학교 3학년 겨울. 이현은 지예와 옛날 일본영화 <러브레터>를 봤다.
설원에 누워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뒤늦게야 느끼게 되는 어린 시절 여주인공.
등산 중에 사고로 죽은 연인. 그가 조난당한 설산을 향해 눈밭 위에서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 여주인공의 모습.
학창시절 "후지이 이츠키"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 동창생과의 추억,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는 첫사랑의 감정들.
"오타루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영화 <러브레터>가 끝나자 지예는 이현에게 갑자기 이렇게 말했었다.
"뭐 말이야? 하얀 눈밭?"
"아니 만나고 헤어지고, 뒤늦게라도 다시 알게되는 사랑의 감정 말이야."
지예는 이현에게 "언젠가 오타루에 같이 가자"고 했었다.
지예의 결혼식에서 돌아온 이현은 곧바로 전혀 예정에 없던 일본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가방을 챙기면서 혼잣말로 되물었다.
'오타루에 가면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이현은 일본행 항공권을 끊었다.
"여행 좀 다녀올게요."
"갑자기? 여행? 돈은 있니?"
이현이 통화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전화선을 타고 어머니의 깊은 한숨이 전해져 왔다.
“알아서 할게요. 걱정마세요.”
어머니와의 짧은 통화가 끝나고서, 이현의 마음 한 켠이 서늘했다.
'나도 부모님에게 한 번쯤 자랑스런 아들이고 싶다.'
이현은 돌이켜보니 인서울의 나름 인지도 있는 대학을 나온 것 말고는 부모님께 기쁨을 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후회가 밀려왔다.
일주일 뒤. 이현이 탄 비행기가 흰 솜사탕 같은 구름을 뚫고 나왔을 때, 태양 빛이 설산 위를 반짝이며 올라오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현은 치토세 공항에서 JR 열차를 타고, 중간에 내려서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흰 도화지 위에 잉크로 나무들을 찍어 놓은 듯 했다. 농가의 지붕들도 온통 흰눈에 덮여 있었고, 굴뚝에서 얇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서도 눈들이 꽤 쌓여 있었다.
'버스 운전기사는 어떻게 길을 구분하고 운전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현이 도로의 윗쪽을 바라보니 아래방향으로 화살표들이 연달아 쭉 이어져 있었다.
'아! 눈이 쌓여 있어서 길을 잃지 말라고 저런 화살표가 계속 있구나. 누가 나한테도 저런 화살표로 길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일본 민요가 느리게 흘러 나왔다. 비에이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눈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찬 공기가 이현의 볼을 할퀴듯이 스쳐 지나갔고, 동시에 그의 폐 속까지 맑은 기운으로 채워줬다.
그는 예약해 둔 민박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발이 눈 속에 ‘푸스슥’ 하고 파묻힐 때마다, 서울의 회색 거리와 이현은 조금씩 멀어졌다.
이현이 머물 민박집은 오래된 2층 목조건물이었다. 처마 끝에 고드름이 하모니카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현관 앞에는 나란히 눈삽 두 개가 기대어 놓여 있었다. 이현이 현관문을 열자, 기름난로의 냄새와 함께 생강차 향이 퍼져 나왔다.
“어서 와요.”
낮지만 굵은 목소리. 집주인은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장년의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타구미'였다. 그가 이현에게 말했다.
“이런 시골까지 혼자서 왔네. 다들 여기까지는 왠지 무섭다면서 혼자는 안 오는데."
남자는 이현에게 이불을 내어주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팔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양 팔뚝은 울퉁불퉁했고, 문신으로 새겨진 검은 뱀 두 마리가 팔뚝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뭐야? 저 문신은?'
이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는 옷 소매를 걷어 내렸다. 그 때 그의 왼손을 보니 검지의 두 마디가 잘려나가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야쿠자는 아니겠지?'
남자는 강렬한 인상과 눈빛을 보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이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서울에서 왔어요? 서울이나 도쿄. 그곳에서는 모든 게 빠르지만, 여긴 다들 눈이 내리고 녹는 속도에 맞춰 살고 있어요.”
이현이 머물 방은 작았지만 창문 밖으로 눈 쌓인 하얀 들판이 보였다. 난로 옆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고양이 이름이 '미쿠'에요. 손을 대면 발톱을 세우니까 조심해요. 잘못 하면 죽을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타구미가 웃었다. 그의 묵직한 웃음 속에 알기 어려운 묘한 무게가 실려있었다. 짐을 풀고, 이현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낮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서울에선 왜 매일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버텼을까.'
이현의 마음을 내려놓는 그 순간. 발치에서 무언가가 '툭' 부딪혔다. 고양이 미쿠가 꼬리를 세우고 다가와 그의 손등 냄새를 맡았다. 이어 작은 혀로 그의 손끝을 핥았다. 이현은 그 따스한 체온을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이현의 시선은 창문 밖으로 향했다. 내리는 눈송이가 유리창에 부딪혀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여기서는 아무도 날 모른다. 만약 내가 이대로 사라져도…'
이현은 가방에서 수면제 약통과 물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수면제를 한 움큼이나 꺼내 놓았다. 그 사이에도 바깥에서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갑작스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이현은 손에 쥔 약들을 이불 아래로 감췄다. 그러다가 그만 수면제 몇 알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삐걱-' 방문이 열리고 집주인 남자가 뱀문신을 한 오른손에는 식칼을, 왼손에는 바구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뭐- 뭡니까? 지금 이러면 경찰 부를 거에요."
이현은 몹시 놀라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이현의 시선이 자신이 쥔 칼에 쏠려 있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이현 옆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침대 옆에 칼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멜론이 제철은 아닌데 먹어봐요. 맛있어."
바구니 안에는 멜론과 접시, 포크가 들어 있었다. 이현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서 문을 나가려다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알약들을 바라봤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춘 채 말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죽을 거면, 아침에 일단 나랑 집앞 눈부터 같이 치워요.”
남자가 방문을 나가자마자 이현은 방금 자신이 한 행동에 실소를 했다.
'죽겠다고 수면제를 쥐고 있던 놈이 칼에 찔려 죽을까 봐 벌벌 떨었다니.'
타구미 씨가 놓고 간 메론은 달콤하고 향긋했다. 이현이 메론을 먹는 사이 문 밖에서 빗질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금 뒤 이현이 문을 나서자 타구미 씨는 눈삽을 건넸다. 차갑게 얼어붙은 삽자루가 이현의 손바닥에 닿았다. 민박집 앞 도로는 허리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이현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쉴틈없이 계속 눈을 퍼냈다. 눈은 갈수록 무거워졌고, 이현의 숨은 점점 가빠졌다. 그러나 그 삽질을 반복할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옅어지는 걸 느꼈다.
“오타루에 일자리를 하나 알아봐 놨어요. 죽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눈 치우는 걸 마친 타구미 씨가 땀을 닦으면서 이현에게 말했다.
“친구 놈이 오타루에 있는 폐창고를 개조해서 카페를 하고 있어요. 당분간 거기에서 일해 봐요. 사람들마다 각자의 상처가 있지."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고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불씨가 피어오르려 하는 느낌이었다. 민박집 앞의 눈 치우기를 마친 다음 날, 타구미 씨는 이현에게 낡은 경차 키를 내밀었다.
“운전은 할 줄 알지?”
“네.”
“그럼 이 차로 오타루에 가서, '구라노키'라는 창고 카페를 찾아가.”
"운전석이 한국과는 반대네요."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한 번쯤은 살아볼 필요가 있지. 곧 익숙해 질거야."
이현은 이른 아침부터, 차에 몸을 실었다. 비에이에서 오타루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렸다. 도로 양옆에 눈이 층층이 쌓여 있고, 눈 위에는 새 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빨간 지붕과 파란 굴뚝이 설원 위에 조각들처럼 놓여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느린 샹송풍의 일본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런 길은 정말 처음이네.'
차창 밖의 풍경은 너무나 평화롭고 여유로웠지만 이현은 운전석이 반대인데다가 눈길이라서 운전대를 양 손으로 꼭 쥐고 운전을 했다.
'타구미 씨 말처럼 익숙해질까?'
오타루시 입구에 들어서자, 항구에서 불어본 바닷바람이 차 유리창을 흔들었다. 오타루 운하는 겨울을 품고 있었다. 반쯤 얼어붙은 물 위에 갈매기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길양 옆의 가스등은 낮에도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물결 사이로 하얀 얼음조각들이 떠다녔다. 이현은 차를 잠시 세우고 풍경사진을 찍었다. 운하 뒤로 석조 창고들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이곳 오타루는 서울의 어떤 거리보다도 느린 시간이 흐르는 것 같네.'
이현의 목적지인 ‘구라노키’는 운하에서 두 골목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겉모습은 오래된 창고였지만, 문을 열자 커피와 나무에서 나오는 향이 가득했다. 한쪽 벽에는 유리공방이 붙어 있었고, 장인들이 뜨거운 불 앞에서 유리막대를 돌리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 위에는 카페 손님들이 남기고 간 여행엽서들과 사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카페의 카운터 뒤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 검은 카디건, 흰 앞치마를 입고 머리는 낮게 묶고 있었다. 그녀는 이현을 잠깐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여기가, 구라노키인가요?"
“네. 맞아요. 한국에서 오셨어요?”
이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발음이 한국사람 같아서요. 그리고 ...”
그녀는 살짝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이 얼어 있네요? 장갑을 안 꼈죠?”
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미오'예요.”
그녀는 따뜻한 커피를 내주었다.
“타구미 씨가 이미 얘기해 주셨어요. 이현 씨가 올 거고, 여기서 일하실 거라고 들었어요.”
“네. 그런데 아직은 일본어가 많이 서툴러서…”
미오를 통해 이현은 타구미 씨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그는 과거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야쿠자'였다고. 이 지역의 옛날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알 정도라고 했다.
"이현 씨는 뭘 잃으셨나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타구미 씨는 야쿠자 였을 때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모든 걸 내려놓고 그곳 비에이에 정착했다고 했었어요. 그리고 사실 이곳에 제 일자리를 소개해 준 것도 타구미 씨 였고요."
마지막 말을 할 때 미오의 표정이 쓸쓸한 미소와 함께 살짝 흔들렸다.
'미오라는 이 사람도 타구미 씨나 나처럼 무언가 잃어버렸던 걸까?'
“일본어가 서툰 건 괜찮아요. 제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그리고 저 한국 드라마 많이 봐서 한국어 잘 해요.”
그녀의 한국어 발음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죠?”
“네. 왜요?”
“서울에 가 보고 싶었어요. 근데… 아직 못 갔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짧지만 어딘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며칠 동안 이현은 카페에서 컵을 닦고, 손님들을 맞았다. 카페 옆에 있는 유리공방에서는 장인들이 꽃무늬 잔을 만들고 있었다. 유리가 새빨간 노을빛 같은 불빛에 녹아서 흐물거렸다. 그리고 오타루의 골목에는 며칠동안 계속 내리던 눈이 그쳤다.
어느 날, 손님이 떠난 테이블을 치우다가 이현은 실수로 유리잔을 떨어뜨렸다. 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괜찮아요?”
미오가 달려왔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비싸긴 하지만, 다친 사람이 없는 게 더 중요하죠.”
그녀는 이현이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
"아앗`"
미오는 조심스럽게 치웠지만 그만 손끝에 작은 상처가 났다. 하지만, 미오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현을 보며 웃었다.
'아플텐데. 왜 이렇게 태연하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현은 왠지 마음이 더 쓰였다.
"잠시만요."
이현은 구급함에서 밴드를 가져와미오의 상처 위에 붙여 주었다.
"호-"
이현은 밴드가 붙어 있는 미오의 손 위로 입바람을 불었다.
"방금 한 거 뭐예요?"
"아! 한국에선 이렇게 상처가 나면 입바람을 불거나, 배가 아프면 문질러 주거나 그러거든요."
이현은 어릴 적에 자신이 다치거나 배가 아플 떄 엄마가 해줬던 일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부모님들은 잘 계실까?'
"아! 맞네. 한국 드라마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로맨틱해!"
미오의 말에 이현은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현의 퇴근길. 오타루 운하 옆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서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현은 카메라를 들고 그 장면을 찍었다. 렌즈 속에서 물결이 바람에 따라 방향을 바꾸면서 흔들리는 모양이 왠지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때, 이현보다 퇴근이 늦은 미오가 뒷골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카페에서의 평범한 앞치마가 아니라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골목 앞의 어둠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떤 차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올라탔다. 차는 이내 골목을 벗어나 대로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현은 잠시 그 자리에서 멈췄다.
"어디로 가는 걸까? 평소에 보지 못 한 모습으로..."
그날 밤, 그의 머릿속에서 미오의 모습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