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죽는데 왜 사는가?

카뮈, 톨스토이 그리고 빅터 플랭클의 대답

by 달여울 작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선고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피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조차 ‘잘 살고 싶은’ 생의 의지가 좌절될 때에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평소에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다가 주변인의 죽음 또는 병이나 노화 등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은 어차피 죽는데 왜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행복, 명증성(이성)을 욕망하지만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이 사이에서 부조리가 발생합니다. 죽음은 가장 명백한 부조리입니다.


인간은 세계라는 산정을 향해 바위를 끊임없이 굴리는 시지프와 같은 처지입니다.

카뮈는 신과 같은 구원, 형이상학적 이상과 같은 삶의 목표에 기대기보다, 다시 말하면 갈망이나 체념이 아닌 부조리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을 촉구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살자가 아닌 기한이 정해진 자유, 미래가 없는 반항, 끝내 소멸할 의식을 자각하면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모험을 추구하는 '사형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의문은 남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합니다. 삶에 정해진 목적과 인간을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삶을 지탱시켜줄 '희망'이라는 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카뮈는 돈 후안, 연극 배우와 정복자, 소설 속 인물과 예술 등에서 부조리 인간과 부조리한 창조에 대한 단편을 제공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 역시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한 이후 장년에 스스로 생을 중단하는 문제에 심각하게 몰두했습니다.


인간은 나무 아래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무지’한 상태거나 눈 앞의 나무에 발라져 있는 꿀만 빨아먹는 ‘쾌락’을 추구하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힘으로 생을 끝내려’하거나 삶의 악이나 허무를 인식하고 나약한 ‘절망’에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은 아내와 자녀보다 일과 형식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사교, 집안 장식과 같은 보여주기식 삶을 지향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법원 판사입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소설 도입부에서 가족과 지인들은 냉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이반 일리치는 그의 신조대로 삶을 가뿐하고 유쾌하고 점잖게 살아오지만 병에 걸리고 죽음에 직면하면서 하인 게라심 이외에는 자기를 이해하고 동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파멸의 벼랑에서 홀로 살아가다가 겨우 죽음 직전에 죽음을 어둠 끝의 빛으로 찰나지만 인식합니다. 마치 우리 자신의 삶을 보는것 같습니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처럼 죽음의 문제 앞에서 분투했던 톨스토이 역시 그가 남긴 ‘고백록’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통한 구원'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가 자신의 유대인 학살을 위한 수용소에서의 경험담을 들려줍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의 생사도 모른채 이별하고 수용소에 끌려와서 모든 것을 잃고 알몸 상태에 놓입니다.


인간이 놓일 수 있는 최악의 지옥같은 상황, 그리고 운에 의해 수시로 생사가 갈리는 수용소에서 그는 살아남아 논문을 내겠다는 미래의 희망과 아내와의 사랑의 기억으로 버팁니다.


이런 현실적인 죽음의 경험을 통해 그는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 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추상적인 삶의 의미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나 명상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받는 질문(시련), 개인 앞에 놓은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구체적인 과제'에 대해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올바른 태도'를 요구합니다.


‘어차피 죽는데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추상적인 삶의 목표나 기대보다는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부조리한 세상과 비합리 투성인 운명에 맞서 '구체적'이고 '강인한 살아내려는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금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 나약한 인간을 붙잡아 줄 ‘희망’에 대해 카뮈는 희망 따위는 없고 ‘견뎌라(또는 즐겨라)’라고 답하고, 톨스토이는 ‘신의 구원’에 기대었으며 빅터 프랭클은 ‘구체적인 삶의 의미 찾기’에 기대었다는 것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나약한 인간의 하나인 저는 죽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한 빅터 플랭클이 말한 ‘구체적인 삶의 의미’와 ‘책임감 있는 태도’에 마음이 기웁니다. 까뮈 역시 나치에 맞선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긴 했지만 '희망' 대신 '견뎌라(또는 즐겨라)'라는 것은 제가 원하는 구체적인 답은 아닌 것 같아서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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