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보물찾기
제네바미술관(Musée d'Art et d'Histoire: MAH)은 기부 형태로 입장료를 받는 미술관이에요. 기본적으로는 무료입니다. 스위스에선 흔치 않아요.
상설전시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커다란 나무 패널에 그려진 그링입니다. 이 패널은 한때 제네바 대성당 제단화의 일부인 이동식 덧문이었고, 주교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베드로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해요.
제네바미술관의 대표 작품으로 소개되는 <기적의 고기잡이>는 1444년 콘라드 비츠(Konrad Witz)가 이 패널들 중 하나의 바깥쪽에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갈릴리 호수에 그물을 던지라 하여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는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매우 초록초록한 그림 배경이 특이하지 않은가요. 스위스 제네바 호수거든요. 성경에서는 분명 갈릴리 호수였는데 말이에요. 서양 회화에서 지형을 식별할 수 있는 최초 사례로 평가된대요. 박물관 기념품 샵에 이 그림 하나만에 대한 백과사전급 두께의 해설 책자가 있어요. 스위스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네요.
다음은 제네바 출신의 화가 장 에티엔 리오타르(Jean-Étienne Liotard) 초상화를 소개해드릴게요.
제가 이 화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독일 드레스덴에서 만났던 매우 새초롬한 여자분을 통해서였는데요.
놀랍도록 정교하고 반짝반짝하게 파스텔화로 표현한 <초콜릿 소녀>를 그린 분이 바로 장 에티엔 리오타르예요.
그럼 제네바 미술관에서 만난 그분의 자화상을 보실까요.
18세기 유럽은 신고전주의 같은 엄격한 형식이 지배하던 시기였어요. 당시의 초상화는 인물의 지위와 품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입을 다문 진지한 표정이 기본이었는데요.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빠진 이가 보일 정도록 웃고 있는 자화상을 그린 거예요. 생동감이 느껴지는 손가락 포즈는 또 어떤가요.
"짜잔! 나야 나!" 정말 자유롭기 그지없네요.
<초콜릿 소녀>를 저리도 아름답게 그려 냈던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이런 모습으로 표현 해낸 걸 보면 노년의 자연스럽고 진실한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혹시 웃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의 그림이 생각나실까요.
저는 이 작품을 보자마자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가 떠올랐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만난 <웃고 있는 소년>처럼 '웃는 얼굴' 하면 '프란스 할스'가 떠오를 정도로 그는 웃음의 선구자예요. 그렇다면 장 에티엔 리오타르의 웃는 자화상은 그다지도 특별하지 않은 작품일 텐데요. 프란스 할스(1580~1666년)는 장 에티엔 리오타르(1702~1789년) 보다 백 년 이상 앞선 시기의 화가였으니까요. 그런데 왜 리오타르의 자화상이 웃는 모습으로 유명해진 걸까요.
프란스 할스가 활동했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귀족적인 격식보다는 서민들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 성격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어요. 그가 그렸던 웃는 얼굴들은 이름 있는 누군가의 초상이기보다는 거친 붓터치로 담은 술집의 악사나 서민들의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그가 그린 작품들은 생동감과 개성이 가득 담긴 풍속화로 봐야 한대요.
마침 제네바 미술관에도 네덜란드 풍속화가 있어요.
다비드 2세 테니에르(David II Teniers)의 동료 혹은 작자 미상의 작품 <오감>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술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고 소란스럽게 즐기는 모습을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오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시끄럽고, 술 냄새가 진동할 것만 같아요.
그런데 모두가 즐거워만 보이진 않네요. 어린아이 한 명이 막 엉덩이를 맞기 직전이거든요.
네덜란드에는 "부모가 노래하면 아이들은 따라 한다."는 속담이 있대요. 어른들이 무절제한 행동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경고를 유쾌한 분위기 속에 슬쩍 끼워 넣었네요. 그래도 아이는 억울하겠어요. 어른들이 너무 대놓고 놀고 계시잖아요.
마지막은 스위스 대표 화가 펠릭스 발로통(Félix Édouard Vallotton) 작품이에요.
작품 보시기 전에 그리스 신화 하나 간단히 소개하자면, 페르세우스는 바다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아이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메두사의 머리를 이용해 구출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후 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고 해요. 이 이야기는 영웅이 괴물을 처치하고 여주인공을 구하는 대표적인 신화적 서사예요.
펠릭스 발로통이 이 신화를 표현한 작품이 바로 제네바 미술관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적 구출 장면 치고는 뭔가 좀 우스꽝스럽지 않으신가요. 괴물인 악어는 생각보다 치명적으로 보이지 않아요. 페르세우스는 보디빌딩 대회에 나온 듯한 포즈로 악어(괴물)를 잡고 있어요.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은 악어를 잡기에는 그의 근육이 좀 과해 보이네요. 구출을 기다리는 안드로메다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격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발로통 특유의 냉소주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취리히미술관(Kunsthaus Zürich)에도 비슷한 주제의 발로통 작품이 있어 함께 보여드릴게요.
이 작품은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이야기와 유사한 구도를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의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속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요. 이 서사시에서는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 괴물이 각각 로제와 안젤리카, 용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용은 제네바 미술관의 악어보다도 덜 위협적으로 보이고 심지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해요. 이번에 로제는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요.
하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안드로메다와 안젤리카의 무관심이에요.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가 1819년에 완성한 작품과 비교해 보면 발로통의 그녀가 얼마나 무관심에 냉소적인지 확연하게 보이실 것 같아요.
미술관에서 발견한 발로통의 냉소가 큰 재미를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