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진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다.
3년 전 한국에 갔을 때다. 여수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사촌동생이 “혼자 있으니 한번 내려오세요” 해서 갔다. 여수는 역시 맛의 도시, 댕기는 안주가 계속 나오는 탓에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는데, “현수 형, 내일은 우리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에 가요.”하고 제안한다. 이런 답은 빠를수록… “좋지”. 낙안읍성은 다른 민속마을과 다르게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조선시대의 서민 마을이다.
드라마 대장금, 허준, 광해, 불멸의 이순신 등이 촬영된 곳으로 알고 있었기에 기대가 컸다. 다음날 느지막이, 여유 부리며 가는 중간에 추어탕 잘한다는 곳도 들러 잘 먹고 낙안읍성에 도착했다. 외진 관광지라 사람들도 없고 좀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주차장 옆에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우리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뭐야, 이 황량한 곳에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라니. 그곳에선 <뿌리깊은 나무> 잡지를 창간한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모은 6,500여 점의 유물과 특별기획 전시를 하고 있었다. 고 한창기 선생의 생가가 근처에 있어서 순천시가 박물관을 그곳에 유치했다고 한다.
한창기 선생은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양 것을 우리나라에 파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한 선생은 출세 코스인 법조인의 길을 거부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직판 세일즈맨 1세대였다.
그가 〈브리태니커〉 세일즈의 리더가 된 것은 영어 능통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지 브리태니커 본사 부사장이 그를 만난 뒤 “동양 사람 중에서 한창기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우리말과 글에서 영어 말씨, 일본어 말씨를 없애고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을 사용했던 것도 이런 특출한 언어감각 덕이었다.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 회사를 창립한 그는 젊은이들을 모아 ‘세일즈 전사’로 키웠다. 본사에서 보내온 ‘브리태니커 사람들의 신조’를 한국판으로 다듬어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외우게 했다. “나는 적극적이다. 나는 부지런하다. 나는 합리적이다. 나는 끈기가 있다. 나는 목표가 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는다.…” 종교의식과도 같은 그런 조회를 마친 세일즈맨들은 전국 팔도에서 뛰었다.
당시 고급 피아노 한 대 값이 넘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날개 돋치듯 팔린다. 창립 2년 만에 세일즈맨을 250명으로 늘렸고, 전성기 때는 1500명을 거느렸다.
한창기 선생의 독특한 의식과 의지는 잡지에 반영됐다. 〈뿌리깊은나무〉 창간호는 잡지계의 오랜 금기를 모조리 깨트린 작품이었다. 그 금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한글 전용 가로 쓰기’다. 〈뿌리깊은나무〉는 교양지들이 고수했던 ‘국한자 혼용’과 ‘세로 쓰기’를 모두 버렸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민족 문화를 민중의 눈으로 보고 민중의 삶으로 이해했다는 점이었다. 잡지의 민중적인 시각은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분야까지 퍼졌다. 1980년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틀어쥔 신군부가 그 ‘불온함’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 해 8월호로 〈뿌리깊은나무〉의 밑동이 잘려 나가 폐간된다.
그러나 한창기 선생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한창이던 시절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한 것이다. ‘여성용 가정잡지’로 등록됐지만 〈샘이 깊은 물〉은 또 하나의 〈뿌리깊은나무〉였다. 이 잡지에서도 그는 꼿꼿함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나도 사회 초년병 시절 잠깐 그들과 함께 했었다. 1997년 2월, 그는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특별한 눈으로 삶의 후미진 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그것을 세상에 보여 주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