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금강산
1994년 봄이다. 박경식 상무(MBC예술단)가 좀 보자고 한다. “황 부장, 인사드려. 최영섭 선생님, 알지?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아, 예. 그럼요.” 그렇게 처음 인사를 드린 후, <가을맞이 가곡의 밤> 공연 때마다 음악 선곡, 출연자, 공로상 수상 심사 등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출연자가 16명 정도였던 <가을맞이 가곡의 밤>은 성악가마다 개성도 강하고 경쟁도 심해서 “누가 나오면 나는 출연 안 하겠다”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반대로 낙하산으로 출연 오더가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최영섭 선생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 주고는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가곡 공로상 심사 때도 선정위원회의 좌장을 맡아 주셨다. 사실 공로상이라는 것이 심사 기준도 애매모호하고 명예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음악인의 특성상, 상을 준 뒤에도 말이 많았다. 하지만, 최영섭이 선정위원장을 했다고 하면 모두들 수긍을 했을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최영섭과 한상억의 인연은 1953년께, 인천에서 시작된다. 6·25 한국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절절하던 시절, 인천여고 음악 선생이었던 최영섭은 스물 넷이고 시인 한상억은 서른여덟이었다. 어느 날, 문화계 모임에서 두 사람은 만난다. 한상억이 대뜸 최영섭에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죠?” “강화 화도면입니다만…” “역시…, 아까 얘길 하는 걸 들으니, 꼭 내 고향 말씨 같아 물었는데, 맞는구먼요. 반가워요. 난, 바로 그 이웃 동네 양도면에서 태어났소. 하, 하, 정말 반갑습니다.” 둘은 이내 가까워지는데, 당시 한상억은 인천 상업학교 출신으로 은행원도 하고 정미소도 가지고 있어서 생활이 여유로웠다. 그래서 교사로 어렵게 사는 최영섭을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
최영섭이 음악회를 하면 그때마다 자금을 대주거나 티켓을 사 주었고, 기독교 장로로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최영섭이 “선생님, 술이나 한 잔 하시죠”하면 두말없이 응했다. 술을 못 마셔도, 반가운 사람과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최영섭은 잡기에 능해 당구를 잘 쳤는데, 그가 당구를 치자고 하면 칠 줄 모르는 당구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같이 시간을 보냈다.
최영섭은 30대 초, 이미 작곡 실력을 인정받아 여기저기 작곡 의뢰가 많았다. 1961년 남산에 있는 서울 중앙방송국(KBS) 길 건너에는 산길 다방이 있었다. 그 당시 산길 다방은 방송국을 드나드는 가수, 성우, 연예인 등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장소였다. 그날도 최영섭은 방송이 끝난 후 변함없이 그곳에 들린다. 마침 그곳에 있었던 한용희(서울 국제방송국 음악 계장)가 최영섭을 보자 “최 선생, 마침 잘 만났습니다. 한강, 낙동강, 압록강, 백두산 고국의 산천 노래들이 다 있는데 금강산이 없어요. 최 선생이 한번 써 보시지요”라며 민족이 함께 부를 <아름다운 강산>을 주제로 한 가곡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최영섭은 곧바로 한상억을 찾았다. “선생님, 뭐, 강산을 주제로 한 좋은 시가 없을까요” “왜 없겠어. 밤낮 강과 산, 바다에 관한 시만 썼는데… 염려 마. 그렇잖아도, 당신 가곡에 써먹을 시를 준비해 놓은 게 있어. 1주일 이내로 줄게” 약속대로 그 1주일 후 시를 받았다. 시 ‘그리운 금강산’은 그의 가슴을 진하게 두들겼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면서 선율이 막힘없이 떠올랐다.
하룻밤 만에 곡을 끝냈다. 그뿐인가 피아노 반주곡, 관현악 반주까지 편곡을 끝냈다. 최영섭으로선 하룻밤에 작곡을 끝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한상억은 광복 전 이미 금강산은 너더댓 번이나 다녀와서 금강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정작 최영섭은 금강산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작곡을 한다. 2003년에 금강산 관광이 개방된 후에서야 다녀왔다.
1984년경 한상억은 아들을 따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간다. 10년 가까이 살지만, 정이 안 드는지 툭하면 서울에 왔다. 서울보다는 산과 강, 바다를 실컷 둘러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최영섭을 불러 함께 여행을 했다.
그런 그의 죽음은, 두고두고 최영섭을 우울하게 만든다. 한상억의 마지막 고국 나들이도 따지고 보면, 고국의 산과 강, 바다 때문이었다. 심장 판막증에 시달리던 그가 어느 정도 완치가 되자 고국을 무척 가고 싶어 했다. 담당 의사의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했다. 한상억은 이미 자신의 죽음과 다시 못 올 모국 산천임을 느꼈는지 고국의 산과 강, 바다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다. 미국에 되돌아간 지 열흘 만에, 76세로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최영섭이 작곡한 600여 곡 중 한상억의 가사가 60곡쯤이 될 정도로 한상억은 가까운 친구이자 형이었다.
나는 2003년 이민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영섭 선생을 뵈었다. “황형, 물과 물고기 같은 관계였던 작사가 한상억도, 조강지처도 이 세상에 없어요. 새로 같이 살던 여인도 무심히 떠났어요. 우리 가곡도 대중가요에 묻혀 더 이상 설 곳이 없네요. 무심한 세월만 흘렀을 뿐이네.” 하며 하소연하는 그에게 차마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운 금강산’ 작곡 당시 서른 안팎이었던 최영섭은 이제 구순의 노인이 됐다.
이 노래는 <가을맞이 가곡의 밤>의 마지막에 관객과 함께 부르는 곡이었다. 어두웠던 객석도 밝게 조명이 들어오고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나오는 사이에 전 출연자가 무대로 나온다. 지휘자가 관객을 향해 돌아서 지휘를 시작한다. 관객들은 팸플릿에 있는 가사를 보며 함께 따라 부르는데, 간혹 흐느끼는 이도 있었다. 커튼이 서서히 닫히면, 무전기로 “모든 출연자, 합창단, 오케스트라, 스태프 여러분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했던, 그 세종문화회관이 무척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