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미국 프로 풋볼 리그(NFC) 결승전인 슈퍼볼(Super Bowl)에서 한국계 미국인 하인스 워드(Hines Ward)가 최우수 선수(MVP)로 뽑힌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미식축구를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하인스 워드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 하나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하인스 워드가 팔뚝에 자기의 이름을 한글로 새겼다는 것, 그리고 하인스 워드가 말끝마다 어머니를 찾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하인스 워드는 주한 미군이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친아버지에게 버려지고 혼혈아라는 친구들의 놀림을 받고 자란 아픔이 있었다. ‘하인스 워드’ 열풍으로 인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혼혈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반성할 기회를 갖게 된다.
고국에서 혼혈인의 존재가 문제 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이후 주둔한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난 때부터다. 혼혈인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차별의 경험을 매우 아프게 간직하고 있다. 이 차별의 중심에 기지촌이 있다. 한국에서 기지촌이란 미군 부대 주변의 동네를 일컫는 표현인데, 미군을 대상으로 성 매매하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갖고 있다.
혼혈인이 어렸을 때 차별을 받은 것은 학교나 동네에서 뿐만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친척으로부터도 혼혈인은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친척들은 자신의 누이 또는 조카가 미군과의 사이에서 애를 낳았다는 것을 창피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혼혈인들의 어머니들은 친정 식구와 관계를 끊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사회 편견은 기지촌 태생의 혼혈인에게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미군과의 평범한 연인 사이도 사회는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유명 가수에게도 이런 시선은 비켜가지 않았다. 혹시, '세월아 네월아'라든가 '아이고나 요 맹꽁', '나는 열일곱 살'을 부른 가수 박단마를 기억하시는지요? 당시 가요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박단마는 1967년에 혼혈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모국을 떠난다. 1956년 미군 헌병 중위였던 리키와 열애에 빠져 그의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한국을 떠나 아들이 10세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거리에 나가면 돌이 날아왔어요. 무서워서 살 수가 없었죠. 아들이 밖에 나가면 아이들이 튀기라고 따돌려 놓기 때문에 결국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선데이서울(1977년 6월)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듣던 박단마의 노래는 당시 다른 노래들에 비해 유난히 리듬이나 템포가 흥겹고 자유분방하며 은근슬쩍 밀고 당기는 창법이 참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월이 지나, 음악 전문가들은 그녀의 창법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미국 재즈 음악의 특징인 래그타임(ragtime), 즉 약박에서 당김음을 재치 있게 활용하는 창법이다. 스윙(swing)이 지니고 있는 동적, 리듬적인 분위기를 진작부터 강하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재즈 음악의 특성을 절묘하고 다채롭게 신민요에 녹여냈다는 해석이다.
박단마는 1921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극작가 이서구 선생의 말에 의하면 유년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 섰었고, 또 권번(일제 강점기 기생 조합)의 기생으로 일하는 언니가 한 번씩 집에 돌아와 조용한 시간에 노래를 부르면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어깨너머로 흉내를 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박단마는 불과 13세 나이에 영화 <고향>에 아역배우로 출연한다.
6.25 전쟁 중, 군예대 대원들과 함께 국군 위문 공연을 하고 있는 박단마.
박단마는 16세가 되던 1937년 6월, 빅타레코드사에서 '상사 구백리(相思 九百里)'와 '날 두고 진정 참말' 등 두 곡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다. 17세에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을 시작으로 북조선 순회공연, 서울 공연, 북지 황군 위문공연 등을 다녀온다.
그녀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건, 열일곱 살 때 취입한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당돌한 열일곱 살 소녀의 적극적이고도 꾸밈없는 고백을 경쾌한 신민요풍으로 부른 이 노래의 히트로 박단마는 단숨에 스타 가수로 떠오른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아리켜 줄까요 열일곱 살이에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별빛도 수집은 버드나무 우 아래로/ 가만히 오세요” 이 노래는 후일 이미자, 조미미, 하춘하, 정훈희, 주현미 등이 리메이크해서 불렀고 개사를 해 <해병 곤조가>의 후렴으로도 불려진다.
1938년에 취입한 ‘나는 열일 곱 살’로 박단마는 단숨에 스타 가수가 된다.
1943년, 박단마는 중국 천진에서 한국인 김정남이 운영하는 악극단 <신태양>에 들어가 손목인, 황해, 심연, 신카나리아, 오인애 등과 함께 멤버로 활동한다. 8.15 광복 후,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 악단과 샛별 악극단 등에 참가하면서 그녀는 발랄함이 느껴지는 독특한 율동과 애교스러운 창법으로 대단한 인기를 얻는다. 특히 K.P.K. 악단에서는 주한미군을 위한 무대 공연을 자주 열었는데, 주 멤버로 활동하던 박단마는 여기서 미국의 재즈곡과 팝송들을 멋지게 불러서 큰 인기를 모았다.
박단마의 절친인 디자이너 노라노는 자신의 자서전에 “명동의 시공관에서 열리는 박단마 1인의 라이브 쇼를 위해 나는 타프타 벨트가 달린 검은색 빌로도 드레스와 구슬을 목 밑으로 늘어뜨린 것을 디자인했다. 무당 부채를 들고 나타난 그녀는 느릿한 가락으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부르다가 갑자기 갓을 벗어던지며 '슈슈 슈슈 슈샤인 보이!'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넘어갔다. 그 순간 극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박단마야 말로 천재적 가수이자 진정한 쇼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당시를 기억한다.
박단마는 혼혈인 아들 때문에 대중의 인기를 버리고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옮겨 가서 살았지만, 결국 리키 중위와는 결합하지 못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그는 벌써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떠나온 고향이 너무도 그리워 1977년 귀국한 그녀는 작곡가 박춘석의 주선으로 <박단마 귀국 가요제>를 연다. 하지만,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던 박단마는 이미 대중들에게 잊어진 존재였다. 귀국 공연과 재기에 실패한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92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재외동포재단의 통계에 의하면 1만 1000명의 혼혈아가 미국으로 입양되거나 이민을 갔다고 한다. 하지만, 집계에 빠진 존재를 더하면 그 수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북미주에서는 혼혈인 자식 때문에 이민을 온 ‘네버 앤딩 스토리’를 지닌 어머니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