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무협 소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처음 <수호지>를 읽을 때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몇 페이지를 보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만했다. <수호지>는 양산박에 똬리를 튼 도적떼의 이야기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 108명이나 등장한다. 뒷골목 주먹 패이거나 땡중, 벼슬아치라 해도 죄를 짓거나 모함을 받아 도망쳤으니 거의 기성 사회에 비껴 있는 사람들이다. <수호지>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이런 아웃사이더들에게 공감하는 민중이 많았다는 증거다.
이렇게 판이 점점 과열되다 보니 대선 관련된 무협 판타지 소설도 연재되고 있다. 중앙일보의 이정재 칼럼니스트가 쓴 <대권무림>은 ‘시사’ 보다는 ‘예능’에 가까운 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재미있는 부분을 몇 개 뽑아 옮긴다.
<대권무림>은 압축된 스토리와 반전을 거듭하는 풍자로 독자들의 흥미와 궁금증을 풀어준다. 등장인물은 무림지존 재인군, 반푼공자 이재명, 나찰수 윤석열, 귀제갈 김종인, 국민동자 이준석 등 현세의 영웅호걸들이 펼치는 현란한 초식(招式: 무협물에서 공격과 방어를 하는 기술)과 웅장한 내공을 풍자 소설화한 것이다.
작가는 이재명의 별호를 반푼공자라 했다. 강호인들은 잘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재명공의 거친 욕설과 터무니없는 포퓰리즘 약속에 가려, 안 보이는 그의 진짜 무공이다. 그는 강호 고수 중 유일하게 흡입마공(吸入魔功)을 익혔다. 흡입마공은 상대의 모든 무공을 빨아들인다. 누구든 그와 한 번 겨룬 자, 그의 무공에 힘을 보태는 도구가 되고 만다. 왜 그의 별호가 반푼공자겠나. 나머지 반푼은 상대의 것으로 채운다는 의미다. 흡입마공의 효용은 또 있다. 익히면 익힐수록 귀를 엷게 한다. 재명공자는 누구의 말이든 쉽게 받아들인다. 그의 세력이 갈수록 불어 가는 이유다. (2021.09.10)
윤석열의 별호는 나찰수(羅刹手)다. ‘악귀를 잡아내는 손’이라는 뜻이다. 나찰수의 특기는 음해마공(陰害魔功)을 파괴해 버리는 기술이다. 음해마공을 쓰는 자가 많을수록 파쇄초식(破碎招式)의 위력이 커진다. 그네 정권 때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청와궁과 여권이 일제히 그를 공격했지만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불충인(不忠人) 초식 한 방으로 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음해마공은 본래 무림 정치법에 의해 엄격하게 금지된 마공이다. 하지만 지금의 여권무림에는 이 무공을 익힌 자가 유난히 많다. 특히 법무판서 박범계, 무림 정보원장 박지원, 팔방무희 조성은의 음해마공은 이미 여의도 바닥에 정평이 나 있다. 그들이 얼마나 음해마공에 능숙한지,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2021.09.17)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따사롭되, 자신에 대해서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라.’ 청와대 여민관 액자에 적힌 글귀다. 2019년 2월이었다. 저 글귀를 수족들에게 전하고 명심하라고 일렀었다. 그때만 해도 자신 있었다. 천하가 나의 춘풍추상을 믿었다. 내 말이 곧 법이요, 내가 곧 진리였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뭔가. <중략> 고 무현 형은 일찍이 내게 무림지존은 다섯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여소야대. 둘째, 지역감정. 셋째 무림 언론. 넷째, 진영 권력. 다섯째, 검찰. 특히 검찰은 조금만 틈을 보이면 주인을 물어뜯는 야수와 같다고 했다. 검찰공은 눈이 없다. 그들은 은밀하게 지존말살(至尊抹殺) 초식을 익힌다. 현 지존의 약점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무공이다. 지존의 힘이 강한 정권 초엔 숨죽이고 있다가 힘이 빠지는 정권 말이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데,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다. (2019.10.31)
백발자(白髮子) 한길공은 "내 귀공에게 한마디 서툰 조언을 하리라. 초패왕은 호랑이였지만 늑대 떼의 우두머리 유방에게 패했소. 초 패왕 항우 말고 그를 물리친 유방이 되시오." 유방은 어떻게 항우를 물리쳤나? 항우처럼 정통 절정 무공을 익히지 못한 유방은 대신 두 가지 기공에 집중했다. 흡입마공과 흡인공. 흡입마공이 세상의 모든 무공을 빨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마공이라면 흡인공은 세상의 모든 무인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마공이었다.
"당금 무림에 흡입마공의 일인자는 재명공자요. 이를 상대할 내공은 하나뿐이요. 바로 흡인공. 귀공은 부디 흡인공을 절정으로 익혀 재명공자의 흡입마공을 상대하기 바라오." <중략> "귀제갈 김종인,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라도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게 시늉이든 진심이든." 한길공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흡인공의 요체는 인(忍), 참고 또 참는 것이요. 인이란 마음(心)에 칼날(刃)이 올려져 있는 모양. 무릇 칼로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소."(2020.11.26)
"사대천왕의 결집이오. 심술도사 홍준표, 새침서생 유승민, 제주의 아들 원희룡과 귀공, 이른바 국힘방 사대천왕이 대오 단결하는 장면을 만들어야 하오. 심술(心術)도사에겐 원하는 걸 다 준다고 하세요. 그는 욕심이 태산 같은 사람, 결코 뿌리치지 않으리라. 차기 방주며 지방 비무대회 공천권부터 공동 정부까지, 달라는 대로 줘도 되오. (2022.01,07)
귀제갈이 입을 열었다. "철수의사 안철수와 나찰수 윤석열의 합력(合力)은 결코 없을 것이요. 혹여 이루어진 들 안철수 쪽으로 합쳐서는 결코 재명공자를 당해낼 수 없소. 안철수가 야권무림의 단일 후보가 되면 영남무림은 그에게 몰표를 주지 않을 것이요. 국힘방의 세력이 철수의사를 위해 뛰지 않을 것이니, 영남무림 출신인 재명공자와 표를 반반 나눠 갖게 될 것이요. 반면 호남무림에선 재명공자에게 9할 이상 몰표를 줄 것이요. 영남무림에서 1백만 표 넘게 차이를 벌릴 수 없다면 싸움은 하나 마나요.” (2022.01.21)
"허허실실이라, 있는 듯 없는 듯하시오. 반푼 재명공자와 그의 측근들은 정족지세가 필승이라며 좋아하지만, 천만의 말씀. 철수의사가 버텨주는 게 오히려 귀공에게 유리합니다. 재야무림의 반문(反文) 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 곳으로 뭉칩니다. 양자 대결이 되면 위기감이 떨어져 비무에 참가하지 않거나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이 있소이다. 그리되면 역으로 귀공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철수의사가 최후까지 버텨야 반문 세력이 모두 귀공에게 올 것이오. 막상 비무 당일엔 재야무림의 모든 힘은 재인군을 이길 수 있는 사람에게 집중되게 마련, 당연히 철수의사의 세력은 모의전투 때와는 크게 떨어져 일할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 (2022.01.28)
<법학개론> 첫 장 첫 줄, “해태(獬廌)는 고대 전설 속의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해태는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렸는데 이 뿔로 죄지은 자를 치받아 물에 빠뜨린다. 법(法)이란, 해태(廌)가 죄인에게 달려들어(去) 물(水)에 빠뜨리는 모습을 본뜬 글자다. 법의 옛 글자는 灋(법)이다.”
해태의 기운을 받은 사람들이 대권 경쟁을 해서인지, 요즘 언론에서는 매일 소설 같은 상상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좋은 소설은 ‘영웅의 진실’을 나쁜 소설은 ‘작가의 진실’을 알린다고 했다. <수호지> 같은 좋은 소설 찾기가 힘든 세상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