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고국에 있는 친구가 ‘추운데 구워 먹으라고 양미리 한 두름’을 그려 보내왔다. 그 연하장을 보니, 신촌 로터리에 있던 <할머니 주점>의 양미리가 생각난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기본 안주로 양파 몇 조각과 고추장, 반 건조 양미리 몇 마리를 연탄불에 구워 주었다. 또 다른 기억은 ‘겨울 속초’다.
1996년 늦은 봄, 속초에 있는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황 선배, 바쁘지 않으면 시간 내서 속초 한번 놀러 오세요.” “아이고, 고마운데 내가 그럴 여유가 있나” 속초 토박이인 후배는 그곳의 법무법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놀러 오라는 게 아니고, 여기 속초에서 제가 지역 축제 자문위원을 하고 있어요.”하며 전화를 건 사연을 말한다. 작년부터 겨울에 <속초 눈꽃 축제>를 하고 있는데, 지방이다 보니 행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문도 해주고 개막 행사도 좀 도와줄 수 없냐’는 것이다.
고국은 1995년부터 지방 자치 선거가 시작되어 각 지역마다 각종 축제를 만들었고, 이런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유치하거나 협업을 많이 하게 된다. 아침 프로그램 등에서 ‘내 고향 소식’이나 ‘지역 축제를 찾아서’ 같은 코너들이 만들어지고, ‘KBS 열린음악회’나 ‘MBC 가요콘서트’ ‘전국 노래자랑’ 등의 쇼 프로그램이 지역 축제와 공동으로 제작된다. 속초는 관광의 도시여서 사계절 내내 크고 작은 축제를 개최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중앙의 눈치를 보다 보니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선으로 뽑은 군수나 시장이 인사권을 쥐고 지역의 발전을 위해 발로 뛰어야 만 하는 지방 자치의 시대가 되다 보니, 좀 더 적극적으로 행사를 추진한다.
그렇게 속초 시청 담당자와 만남이 이뤄졌다. 속초시는 “<일본 삿포로 눈축제> 같은 행사를 만들고 싶다”고 하였다. <삿포로 축제>는 1950년에 시작한 세계적인 축제여서 그 규모나 예산, 동원 인력이 어마어마한 행사였다. 1972년 동계 올림픽이 삿포로에서 개최되어 눈 축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는데, 속초에서 그런 행사를 하겠다며 “개막 공연을 MBC에서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함께 출장 간 이벤트 PD와 행사 장소, 예산 등을 협의한 후 돌아오며, 내가 “이 행사할 수 있겠어?”하니, “아니요. 개막 프로그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행사 기획부터 우리가 다시 정리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속초시가 예산도 없으면서 공연히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요?” 한다. 그렇게 시작한 <속초 눈꽃 축제> 프로젝트는 여러 과정을 거쳐 다음 해 1월 말에 개최된다.
처음 우리와 협의를 시작할 때는 개막 공연 만을 해 주기를 원했지만, 담당 PD의 기획서를 받아 본 후, 시간이 지나가며 욕심을 내어 전체 행사를 해 주기를 원했다. 마침 우리도 지역 축제를 론칭(launching)하고 싶었기에 행사 전체를 주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 행사라 보니 강원도에 있는 기존 업체들의 반발이 심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자기들 행사까지 서울에서 가져가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서울에서 모든 협력 업체가 다 내려갈 수도 없고 해서 강원 지역 업체에게 무대나 음향, 기념물 설치, 행사 유도 사인 등을 하청(?)을 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방 업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어서 개막일이 다가오며 여러 차질과 마찰이 생긴다.
2주일 전부터 속초로 출장 가 있던 담당 PD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장님, 이거 큰일 났어요. 지역 업체들이 영세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요. 제시간에 행사 준비가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그리고 더 큰 일은 이곳에 눈이 안 와요. 지금 눈으로 예술 조각을 만들려고 작가들이 내려와 있는데 눈이 없어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라고 한다. “뭐? 눈이 없다고…” 속초시와 비상 대책회의를 했다.
우리 생각에 속초는 바닷가에다가 국립공원인 설악산이 바로 옆에 있어서 눈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설상가상으로 날씨까지 포근했다. 속초시청은 비상이 걸렸다. 설악산에서 행사장인 속초 공설운동장으로 눈을 퍼 날랐다. 수십대의 트럭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운동장에 눈을 깔았고, 작가들은 밤새워 눈과 얼음으로 조각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 개막식은 치렀지만, 푸근하고 얄궂은 날씨 때문에 눈조각들이 녹아내렸다. 행사장 바닥에 깔아 놓은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펄 밭이 되었고 관객들은 신발이 진흙에 빠져 걸음을 옮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개막일 다음날, 처음 행사를 부탁한 속초 후배가 “소주나 한잔 합시다”며 나를 근처 동명항으로 데리고 갔다. “회는 자주 먹었으니, 오늘은 양미리를 좀 먹죠” “어, 좋지” 해풍으로 반 건조된 양미리 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병이 비어 가는 만큼,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이번 행사를 하면서 어려웠던, ‘지역 업체의 텃세’, ‘애초부터 속초에 눈이 이렇게 안 오는데 <눈축제>는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실패 원인을 토로했다. 행사가 제대로 치뤄지지 않아 서로, “미안하다” 했다. 그러면서 “황 선배, <눈꽃 축제>는 이제 잊고, 우리 이 <양미리 축제>를 한번 기획해 보면 어떨까요?” 한다. “뭐, 양미리 축제?” “이 양미리가 속초의 명물이에요. 날씨가 쌀쌀해지면 이 양미리가 엄청 나오는데…”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오늘은 그냥, 양미리나 먹자!” 우리는 그날, 한 두름의 양미리를 먹어 치웠다.
두 달 뒤, 속초 후배로부터 우편물이 왔다. ‘황 선배, 내가 양미리 자료 좀 찾아봤어요. 참고하시고 조만간에 제가 한번 올라 갈게요’ 하는 편지도 함께 있었다.
보내준 자료에는, “양미리는 ‘양’과 ‘미리’의 합성어로 양(洋)은 큰 바다, 미리는 용처럼 생긴 미꾸라지를 말한다. 그러니 ‘바다 미꾸라지’ 다. 등이 푸르고 배는 은백색이며 주둥이가 뾰족해 모양은 미꾸라지보다 꽁치에 더 가깝다. 동해안에서는 양미리라고 부르고, 서해안에서는 까나리라 부른다. 서해안에선 주로 봄에 어린 까나리를 잡아 젓갈을 담고, 동해안에선 겨울에 성숙한 까나리를 잡아 굽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졸여서 먹는다. 동해의 양미리는 겨울부터 초봄까지 연안에 바싹 붙어 알을 낳고 평소에는 굵은 모래 속에 몸을 감추고 산다. 동트기 전에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모래에서 물 위로 한 번씩 튀어 오르는 습성이 있는데, 이를 알게 된 어민들이 미리 바닥에 깔아 놓은 그물에 그대로 꽂힌다. 어선이 그물을 육지에 내려놓으면 쪼그리고 앉아 양미리를 그물에서 떼어내는 아낙네의 모습은 겨울철 동해안의 진 풍경이다.” 나는 그 우편물을 대충 읽고 파일 박스 어디엔 가에 쑤셔 넣었다.
그 뒤 토론토로 이민을 오는 바람에 <속초 눈꽃 축제>는 잊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기록을 찾아보니, 행사 장소를 설악산 국립공원 내로 옮겨 개최하고 있다는데, 아직도 강설량이 적어 여전히 애를 먹는 것 같다. 속초 후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속초 양미리 축제>는 2006년부터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양미리를 불에 구우면 하얀 속살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익힌 놈의 꼬리를 잡고 소금에 찍어 머리부터 뼈 채로 먹으면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난다. 친구가 보내온 연하장에는 그 양미리의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