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월요일에 아내와 함께 <코비드-19> 3차 백신을 맞으러 갔다. 지난 1~2차 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차례가 왔다. 그런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 주는데, 주사약이 ‘화이자’가 아니고 ‘모더나’라는 거다. 지난 2번을 화이자로 맞아서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할 때, ‘화이자를 맞겠다’고 했는데, “성인들은 당분간 화이자가 모자라서 모더나로 맞아야 된다”고 한다. 아내는 뭔가 잘 못 됐다며, “모더나를 맞으면 아프고 후유증 있다는데…”하며 주사 맞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서 어쩌겠나? 다시 예약을 하면 언제나 다시 차례가 돌아올지 모르고 해서, 내가 나서서 먼저 주사를 맞았고 아내도 쭈볏쭈볏 망설이다가 따라 맞았다.
돌아오며 ‘공연히 찜찜한데 내가 너무 밀어붙였나’ 싶어 은근히 아내에게 미안했는데, 그날 저녁부터 주사 맞은 어깨가 쑤시고 팔을 들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아내가 방에서 나오지 않아, 일단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부터 하고 다시 올라갔다. “여보, 괜찮아? 내가 예쁜 짓 했어!”하며 말을 걸었더니, “뭐… 당신 밥 했어?”한다. “… (잠시 침묵) 아니, 설거지!” 아내의 표정이 좀 실망한 듯해서, “여보, 움직이지 말고 푹 자” 하며 내려왔다. ‘아, 설거지보다 밥을 먼저 해야 하는 건데…’
‘새해에는 아내에게 예쁨(?) 받는 남편이 돼 보자!’는 마음으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밥을 해 본 지가 언제인가? 아내가 손녀 보러 한국 갔던 4년 전에 하곤 처음인데… 그때 사용했던 전기밥솥을 찾아보니, 어디에 쳐 박혀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알량한 밥 한번 지으면서 아파 누워 있는 사람에게 다시 올라가 ‘전기밥솥 어디 있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냄비에다 밥을 지었다. 하지만, 전기밥솥은 쌀만 씻어 넣고 취사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냄비에다 하는 밥은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쌀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4번 정도 씻고, ‘그래야 밥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다음에 씻은 쌀을 물에 담가 불리고, 이왕 하는 김에 ‘김치찌개도 한번 만들어 볼까’ 싶어서 참치 통조림을 찾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그 사이에 쌀은 잘 불려졌고, 냄비에 안쳐서 15분 정도 센 불로 끓인 다음, 뭉글한 불로 30여분 뜸을 들이니 나름 ‘자랑스러운 쌀밥’을 지을 수 있었다.
밥을 지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음식은 대개 ‘굽다, 볶다, 찌다, 끓이다’로 표현되는데, 밥은 왜, ‘짓다’일까? 농사를 하는 행위도 ‘농사를 짓다’로 하듯, 집이나 건물도 ‘짓는다’라고 하고, 약도 ‘짓다’이다. 좀 세밀한 과정을 거치는 것들을 ‘짓다’라고 하나, 싶었다.
어느 칼럼에 “밥의 기본은 쌀이지만, 1970년 이전만 하더라도 매일 쌀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살림이 넉넉한 가정은 드물었다. 그래서 쌀에 약간의 곡식을 넣어 부족한 양을 메웠는데 보리, 조, 수수, 콩, 팥 등의 잡곡을 넣어 밥을 지었다. 그래서 여러 잡곡을 섞어 ‘짓다’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는 의견이 있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하며 밥 먹고 하자고 보채고, "밥 먹었니?" 하며 인사하고, "밥이나 같이 먹자"고 만남을 기대한다. ‘찬밥 더운밥 가리랴?’라는 속담도 있고, 요즘 같은 정치판을 빗댄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도 있다. 같이 밥을 먹어야 '식구(食口)'이고, 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한솥밥' 먹는 사이로 말한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친구들도 같이 밥을 먹은 수만큼 비례해서 친한 정도가 다르다. ‘그 친구 하고는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밥 한번 먹은 기억이 없다’ 면 벗이 아니라, 그저 같이 학교 다닌 동창이다. 애인을 사귀는 것도 얼마나 자주, 맛있는 밥을 같이 먹었느냐에 따라 서로 사랑의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밥’은 관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일 수 있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그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인다. 생일을 맞거나, 입학, 졸업, 취업 등을 축하할 때도 결혼식, 약혼식 같은 기념일에도 같이 모여 밥을 먹는다. 환갑이나 고희, 하물며 누가 죽어 초상을 치를 때도 밥을 먹어야 서로 위로가 된다. 밥도 안 먹고 갔다고 하면 서로 뭔가 찝찝하고 불편한 관계다. 그러고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밥’이 끼어 있어야 가까워진다. 그냥 커피나 마시는 것과 밥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르다. ‘밥 정’이 없으면 서로 책임과 의무도 없다.
시인 백동흠이 지은 <밥>이라는 시다.
음식은 삶의 질이 나아지며 여러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음식과 재료, 가공과 조리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식생활의 변화는 아주 느린 것 같지만, 꾸준하게 변화했다. 다만,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 흡수하는 형식으로 변해 왔다. 요즘에는 김치찌개에 참치가 들어가고 빨간 고추 대신, 파프리카가 들어간다. 간장과 소고기로 만들었던 전통 궁중 떡볶이는 이제 고추장과 어묵, 치즈가 들어가 대중들이 먹는다. 서로 섞일 수 있는 음식들은 합치게 되고 여러 입맛을 통과하면 새로이 식탁에 오른다. 순대를 먹던 사람이 소시지를 먹고, 소시지는 다시 찌개에 들어가 부대찌개가 된다. 피자나 햄버거에도 불고기나 김치를 넣어 만들고, 녹두 빈대떡에 통조림 콘이나 햄, 치즈 등이 들어 가 아이들의 입맛을 맞춘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음식 문화가 바뀌어도 ‘밥’은 그 고유의 맛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밥을 먹는 일본, 중국, 동남아 국가들이 있지만, ‘한국의 밥’ 짓기는 뚜렷한 특색과 전통을 잃지 않고 있다. 선조들이 지은 가마솥 밥알에는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 반찬과 찌게, 국, 요리들은 밥을 먹기 위해 만들어지고, 그러므로 밥상의 주인공은 역시 ‘밥’이다.
어린 시절 길들여진 밥맛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손맛이다. 그 어머니의 밥맛은 그전 할머니로부터 또 그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조리법으로 만든 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나처럼 토론토에 살면서도 어릴 적 밥맛은 노인이 될 때까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밥맛에 가까이 가고 싶어 진다. 고국보다는 다양하고 맛있는 빵들을 접 할 수 있지만, 빵이 밥을 대신하지 못한다. 빵은 두 끼 이상을 먹으면 벌써 물리는데, 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밥’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밥은 전통이고 생명이고 삶, 즐거움이다. ‘밥’을 못 먹으면 사는 게 아니다. 아내가 아프면서도 ‘밥’ 걱정을 한 이유다. 그나저나 코비드 때문에 밥 한번 같이 먹기가 이렇게 힘든 세상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