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은 실향민이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가 언론에 나올 때마다 귀 기울이게 된다. 혹시라도 북에 남겨진 가족을 만날 수도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어머니께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 ‘언젠가는 우리 가족의 차례가 오겠지’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시간이 점점 지나며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이렇게 찔끔찔끔 200여 명씩 만나면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실향민들이 다 상봉을 하겠나’ 싶었다. 또한 행사에 참여하는 대상을 보면 남북 모두 ‘좀 잘 살고 있는 사람’만 뽑는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를 하자”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쉽게 마음을 접지 못하셨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봉상균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대구 효성여대 교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박소영이다. 봉준호 감독이 세계를 놀라게 하자, 그의 가족에게도 매스컴의 관심이 커진다. ‘북에 살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큰 이모’이라는 기사가 다시 언론에 재조명된다.
2006년 6월에 3일간 금강산에서 열렸던 <제14차 남북 이산가족 행사> 때, 봉준호의 어머니 박소영이 북한에 살고 있는 언니 박설영을 만난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월북해 평양 기계 대학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그녀의 아버지 박태원은 1986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박태원과 큰 이모가 6.25 전쟁 중에 월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외할아버지 박태원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청계 풍경>, <갑오농민전쟁> 같은 작품들은 들어 보았을 성싶다. 박태원은 작가 이상(李箱)과 함께 1930년대 한국 문단에서 모더니즘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고, 문인 단체 ‘구인회(九人會)’의 멤버였다. 일제가 한국 문학을 탄압하던 시절,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스케치 형식으로 묘사하는 모더니즘 방식의 글을 썼다.
박태원은 해방이 되어 조선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전향한다. 보도 연맹은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한 단체였지만, 6·25 전쟁이 나자 이승만 정부는 후퇴하면서 보도 연맹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처형했다. 당시 박태원은 구금돼 있었는데,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풀려난다. 벌써부터 충청도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은 처형당하거나 테러를 당했기에 위험을 느낀 박태원은 혼자 북으로 넘어간다. 남겨진 가족들은 1.4 후퇴 때, 서울 이남으로 피난을 가는데, 큰 딸 설영만 외가인 이화동에 남게 된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설영은 북한 정부의 인력 동원으로 뽑혀 병원에서 인민군을 간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에 부역한자는 처단한다’는 말에 철수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간다. 여러 추측이 있겠지만, 아마도 박태원은 잠깐 피신한 후에 남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분단이 이루어지고 북으로 간 박태원과 큰 딸은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은 가족들의 처지는 참담했다. 박태원의 처, 그러니까 봉준호의 외할머니는 인민군복을 빨래한 죄로 징역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5년으로 감형됐다니, 어머니를 감옥에 보낸 가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태원의 월북을 두고 놀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좌익 비슷한 글을 쓴 적도 없고 서울 태생인 ‘댄디 보이’가 갑자기 북으로 가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북으로 간 박태원은 평탄하지 못했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으로 몰리는 이른바 ‘남로당 숙청의 피 바람’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교수로 잘 지내던 그는 남로당 계열로 몰려 4년간 평남 강서 지방의 협동조합으로 추방된다. 이때 영양실조로 눈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는데 이후 복권이 되지만, 그의 시력은 회복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무리한 집필로 뇌졸중까지 찾아와 반신불수가 된다.
하지만, 무척이나 온아하고 세련된 품격을 지닌 그는 그런 형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문학의 혼을 최대한 끌어올려 집필을 했다. 손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구술로 글을 썼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이다.
다시 이야기를 2006년 6월 금강산에서 있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자리로 옮긴다. 반세기 만에 한자리에 둘러앉은 박태원의 4남매. 눈 오는 날에 태어난 설영은 자신의 바로 아래 여동생 소영의 아들이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말에 놀란다. “준호라는 조카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러면서 자신도 “조카가 만든 영화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한다. 아마 그녀가 생전에 조카 봉준호의 영화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봉 감독의 어머니, 소영은 “준호가 연출한 3편의 시나리오도 직접 쓰는 등 글 솜씨가 있는데, 이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며 자랑한다. 그리고 싸리나무로 둘러쳐 있던 성북동의 옛집이며 활달한 성격으로 핸드볼 선수를 했던 큰 언니 이야기, 남편을 그리다 홀로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등으로 시간을 뒤집고 헤치며 밤새 울고 웃는다. 다음날 4남매는 또다시 남과 북으로 헤어진다.
2020년 3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자, 북한 ‘통일신보’는 이례적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작가’라는 제목으로 박태원의 삶과 문학을 5,000자의 장문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신문은 봉 감독을 비롯한 남쪽 가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북한이 대남 매체를 통해 박태원을 새삼 조명하는 것은 봉 감독이 국제적으로 거둔 쾌거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2022년 현재,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3만 4천 명이라고 한다. 남북 정부가 서로 빠듯한 ‘셈’을 하고 있는 사이에 이산가족들의 나이가 구순을 넘고 있으니, <이산가족 상봉>은 이제 물 건너간 이벤트가 되어 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