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들어 일본은 만주 침략을 준비하며 조선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거기에 세계 공황의 충격이 겹쳐 조선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 무렵 조선 농촌은 끼니를 걱정할 지경에 이르러 농민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한편으로 일본의 간도 정책에 따라 대거 만주로 이주하고 있었다.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共同山 묘지) 가고/ 아이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깨나 멜 놈은 일본 가고/ 신작로 가장자리 아카시아 나무는 자동차 바람에 춤을 춘다’라는 당시 유행했던 구전 가요 <아리랑 타령>이 그 시대 상을 말해 준다.
1930년 4월, 동아일보는 정간 처분을 받는데, 미국의 ‘네이션’지 주필 빌라즈가 보내온 <창간 10주년 기념 축사>를 게재한 것이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벌써 세 번째 정간의 철퇴였다. 3차 정간은 4개월 반 만에 풀렸지만, 총독부의 언론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그해 9월에 다시 신문을 발행하며, 민중의 표현 기관으로서 ‘조선 민족에게 희망을 중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조선의 놀애’를 공모한다. 언론사가 나서서 국민 창가를 모집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애국 애족 사상을 담은 10여 개의 창가가 있었지만, 온 국민이 애창할 만큼 널리 불리는 노래는 없었다.
“<사고> 모든 조선 사람이 깃브게 부를 조선의 놀애를 가지고 싶습니다. 조선의 땅과 사람과 그의 힘과 아름다움과 그의 빛난 장래에의 약속과 희망. 이런 것을 넣은 웅대하고 장쾌하고도 숭엄한 놀애. 과연 조선의 놀애라고 하기에 합당한 놀애를 구하는 것은 아마 조선인 사람 전체의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본사에서는 이러한 건성(虔誠)으로 만천하에 조선의 놀애를 모집합니다.”
창가 공모에 1등 30원, 2등 20원, 3등 10원의 상금을 내걸었는데, 당시 쌀 80kg 한가마가 13원이었으니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가사 응모할 때, 작곡도 할 수 있으면 함께 하면 좋다’는 조건이 포함되었다.
당시 심사위원은 시인 이은상이었는데, 아쉽게도 당선작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아일보는 이은상에게 공모된 작품 중에 좋은 구절을 하나씩 뽑아 가사를 만들어 주기를 부탁한다. 1931년 1월 21일 자 지면에 ”당선 창가, ‘조선의 놀애’라는 가사가 눈에 띄게 실려 있다. 실제로는 한자가 많고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다르지만, 기사 자체는 그대로 게재되어 있다.
1930년 9월, 동아일보는 일제 강점기 고통받는 조선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조선의 노래’를 공모한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동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예사는 우리 이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조선이로세/
삼천리 아름다운 이내 강산에/ 억만년 살아갈 조선의 자손/ 길러온 재조와 힘을 모두세/ 우리의 앞길은 탄탄하도다/
보아라 이강산에 밤이 새나니/ 이천만 너도나도 함께 나가세/ 광명한 아침 날이 솟아오르면/ 깃븜에 북받혀 놀애 하리라’
이듬해 이 가사에 작곡가 현제명이 곡을 입혀 노래를 만든다. 1932년 4월 동아일보에 ‘조선의 놀애’ 악보가 실렸다. 이 곡이 발표되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게 되고 ‘국가(國歌)가 없던 시대에서 사실상 국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본은 1938년 ‘조선의 놀애’를 금지시켰지만, 노래는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광복 후 ‘조선의 놀애’는 '조선의 노래’로, 다시 ‘대한의 노래’라고 제목을 바꾸고 가사를 ‘이천만’에서 ‘삼천만’으로 또다시 ‘사천만’으로 약간씩 손질하며 본격적으로 널리 불리게 된다.
이 ‘조선의 노래’는 1970년대 초까지 불려지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 앞에 함께 불려지는 노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로 시작되는 동요인데,
1931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의 노래’는 ‘원숭이 엉덩이’라는 구전 동요와 묘하게 어울려 함께 불리어진다.
일본 식민지 시기의 노래를 연구하는 재일동포 홍양자 교수는 ‘원숭이 똥구멍’은 일본 전래 동요 ‘이로하니 별사탕(いろは 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노래가 ‘조선의 노래’가 만들어진 1931년경부터 함께 불려진 것은 아니며, 아마도 나중에 만들어진 ‘원숭이 똥구멍’을 언젠가부터 함께 불려지게 된 것 같다고 한다. 홍 교수는 ‘원숭이 똥구멍’ 이외에도 지금 불려지는 한국 동요들 중에는 일본 전래 동요가 변형돼 불려지고 있는 것이 많다고 한다.
하여튼, ‘원숭이 똥구멍’이 일본 전래 동요의 영향으로 개사한 것이라면 노랫말에 일제 강점기에 대한 반감이 숨겨 있다고 봐야 옳다. 요즘도 일본 사람을 원숭이에 빗대는 정서가 있고, ‘원숭이의 똥구멍’은 빨갛다고 지적하며 비틀어 꼬는 것이다. 또한 ‘맛있으면 바나나’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이고, ‘바나나는 일제 강점기에 남쪽 나라로부터 침탈해 들여온 귀한 과일이어서 일본 관료들이나 돈 많은 일본인들이나 먹을 수 있었다’는 것도 나름의 논리이다. 또한 '빠른 것은 기차’, ‘높은 것은 후지산’ 등 유사한 구절이 ‘이로하니 별사탕’에 담겨 있어, ‘개사’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요즘은 ‘원숭이 똥구멍’을 ‘원숭이 엉덩이’로 순화해 부르고 있지만, 똥구멍은 원숭이를 비하하는 표현이니 바꾸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바나나는 길고,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를 지나 백두산이 나온다. ‘높으면 백두산’이라고 꼭 집어 말하는데, 이 부분이 없었다면 민족주의적 의미도 없는 그저 일본 전래 동요를 바꿔 부른 것에 그칠 뻔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에게 가장 높고 자부심을 갖는 영산이다. 이 백두산이 ‘원숭이 엉덩이’와 ‘조선의 노래’가 맞물리며 ‘백두산 뻗어 내려 반도 삼천리’로 이어져 희망과 용기와 북돋음을 주는 노래로 변한다. 이 노래는 따로따로 부르기도 하지만, 같이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일제 강점기, 치욕의 시대에서는 함부로 부르지도 못했던 ‘조선의 노래’가 아이들의 구전 가요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어느 지점에서 ‘원숭이 엉덩이’와 결합되어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무심코 불렀던 ‘조선의 노래’가 선조들의 지혜로움이 숨어 있는 최초의 국민가요였다는 것을 이번에 글을 쓰며 알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