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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수 Mar 18. 2022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의 ‘까레이스키’에게 평화를...


2 주전, 고국 YTN 뉴스 앵커의 긴장된 목소리. “[앵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현지 연결해서 자세한 상황 알아보겠습니다. 키예프 국립외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강정식 교수님 전화로 연결돼 있습니다. 교수님, 나와 계십니까? 교수님, 안녕하세요. [강정식] 안녕하세요? [앵커] 일단 현지 시각이 밤 11시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강정식] 11시 넘었습니다. [앵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군요. 일단 교수님, 안전한 곳에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금 계시는 곳이 키예프 시내입니까? [강정식] 아닙니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시외. [앵커] 시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요. 외신을 보면 체르노빌이 러시아군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있더라고요. 그곳과 한 100km 떨어진 곳입니까? [강정식] 그렇습니다. 


[앵커] 그렇다면 현지 상황도 궁금합니다. 일단 러시아군 공격으로 폭발음이나 화재에 연기 같은 게 지금 육안으로 확인되고 있습니까? [강정식] 네, 반 시간 전에도 벌써 한두 번 정도 보였습니다. [앵커] 그렇다면 지금 계신 곳 주변에 군 공항이나 군사시설 같은 게 있을까요? [강정식] 공항이 있습니다. 공항이 있고 지금 군사공항이 있는데 거기를 러시아 군대가 점령을 했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이 또다시 공격해서 다시 돌려냈습니다. [앵커] 지금 하신 말씀은 군사 공항이 인근에 있는데 러시아군에 점령을 당했다가 우크라이나군이 다시 찾았다, 이런 얘기이십니까? [강정식] 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인터뷰를 한 강정식 교수는 우크라이나 고려인이다. 강정식 교수는 사할린 이주 1세대인 부모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강해동은 충북에서 1942년 사할린으로 이주했고, 어머니 김학선은 경남에서 왔다. 둘은 1946년 사할린에서 결혼해 1948년 강정식을 낳는다.


그 후 부모를 따라 키예프로 거주를 옮긴, 강정식 교수는 키예프 공대를 나와 해당 분야 공장에서 20년을 재직하였는데 그 공장에서 10년을 부사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키예프 세라믹 후도레스트이>에서 일하다가 1985년 소련 정치 개혁 이후, 경제적 침체를 맞아 전공을 바꾸어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히고 키예프 외국어대 한국어 학과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2010년에 우크라이나 고려인 협회장을 맡아 <고려인 문화센터>를 개관하고, 고려인 문화 축제인 ‘까레야다’를 민족 축제로 자리 잡는데 주요 역할을 한다. ‘까레야다’는 고려인 협회 주관으로 매년 9월부터 10월 중,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한민족 문화축제다. 1995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행사는 부채춤과 같은 한국의 전통 무용을 비롯해서 사물놀이, 노래자랑 등이 진행되며 전시회, 태권도 시범, 한국음식 페스티벌도 펼친다. 고려인들은 이 축제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 문화와 유대감을 다지는 한편, 고려인의 자긍심을 높여 가고 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의 삶이 알려지게 되는 것은 1995년 1월, MBC에서 방영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서다. 러시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 굶주림과 뼈를 깎는 추위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고려인의 한 많은 인생을 그린 드라마다. 총 22부작으로 과감한 기획과 제작비를 투자해 만들었지만, 기대만큼 알려지지는 않았다. 드라마 소재인 러시아의 유민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것이어서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고, 주인공들이 대부분 신인들이었던 점도 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SBS가 사활을 걸고 제작한 <모래시계>와 편성이 겹쳐 <까레이스키>는 2.4%라는 굴욕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불운의 드라마였다.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해 강제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고려인들은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거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의 황무지로 옮겨진다.

까레이스키는 ‘고려라는 뜻의 러시아어 ‘까레이에 국민을 뜻하는 접미어 ‘스키를 붙인 말이다조선말, 고려인들은 연해주와 만주에 넓게 이주해 한인 집단촌을 이루며 살았다. 먹고살기 위해 간도로 가기도 했고 일본 경찰에 쫓겨 도망간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들어선 소련 정부는 1930년대에 일본과 대립하는 상황이 되자, ‘일본이 고려인 사회를 통해 극동 러시아 지역에 간첩을 침투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극동 거주 고려인 약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1937년 9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고려인들은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거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의 황무지로 옮겨진다.


이 강제 이주 중에 1만 1000여 명이 도중에 숨진다. 이듬해 봄, 고려인들은 보따리 속에 간직한 볍씨를 뿌려 농사에 성공한다. 황무지에 꽃이 폈다. 고려인들의 강력한 생명력은 소련 내의 소수민족 중에 가장 잘 사는 민족이 된다. 그래도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고려인은 거주 이전이 제한됐고 공민권도 빼앗긴다. 

까레이스키는 ‘고려’라는 뜻의 러시아어 ‘까레이’에 국민을 뜻하는 접미어 ‘스키’를 붙인 말이다.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권이 회복된다. 고려인들의 인식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는 건,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라고 한다. 현재, 러시아 독립 국가 연합 내에는 50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고 우크라이나에도 3만 5000명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 수는 <고려인 협회>가 집계한 것이고, 알려지지 않은 고려인을 합치면 더 많은 ‘까레이스키’가 살고 있다고 봐야 옳다. 


 강정식 교수는 "우리는 어디에서 살든 조선인, 고려인, 한국인, 북한인이라 불려도 서로 뭉쳐서 살아야 한다. 우리 문화를 가르치고 익혀서 문화, 풍습 언어를 익혀서 뭉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한 말은 어쩌면 이 시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들에게 하는 말이지 싶다. 


이제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을 아우르며 민족의 개념을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해야 한다. 미국, 캐나다, 일본, 브라질, 쿠바, 호주, 뉴질랜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을 한반도 너머의 ‘우리’로 확장해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고려인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와 ‘까레이스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며, 증오에는 사랑으로 불의에는 정의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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