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친한 네 부부가 1박 2일로 여행을 갔다. 가는 곳이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어 아침에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저 멀리 서쪽 캐임브리지(Cambridge)에서 오는 일행도 있어, HWY 404와 스토우프빌(Stouffville)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니, 주차장이 좁고 자동차들이 번잡하게 다녀, 식사할 분위기가 아니다. “주위에 어디 다소곳한 곳이 없을까?” 누군가, “요 앞에 골프장이 있는데...”라고 하자, 모두들 눈빛이 반짝였다. 더 이상 말도 필요 없이 시동을 걸어 그곳으로 가서 싸온 김밥과 뜨거운 커피를 곁들여 잘 먹었다.
코티지(cottage)는 할리버튼(Haliburton) 근처에 있었는데,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알곤퀸 주립공원이다. 코티지는 2층 규모로 4 베드룸과 화장실 2개로 아름답고 조용한 호수 바로 옆에 있었다. 인터넷도 가능하고 TV며 당구대, 바비큐 그릴, 모터보트, 카누, 수중 자전거, 물놀이 기구 등이 우리를 맞이했다. 근처 10분 거리 마을에 식료품점, 비어 스토어, LCBO 등이 있는 곳이 있어 코티지가 아니라, 주거용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바라보이는 2층 테라스에 준비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혼자였으면 가격이 비싸, 선 뜻 먹을 수 없었던 LA 갈비도 굽고 상추, 게장, 동치미, 방울토마토, 샐러드, 산마늘 무침, 풋고추, 각종 밑반찬 등이 한 상 가득 푸짐하다. 청량한 날씨까지 우리를 축복하는 듯, 파란 캔버스에 흰 뭉개 구름이 덧칠하듯 펼쳐 있다. 그런 풍광과 맥주에 취해 수다들이 오고 갔다. “바비큐 해먹은 게 몇 년 만이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네” “이번에 집 잘 팔고 나왔어. 지금 집 값이 계속 떨어진다고 하던데...” “스위스에 있는 아들은 잘 있는가?” “장 선배는 한국 갔다가 와서 피곤한가 봐?” “홍 단장 따님 결혼식이 언제 지?” “요새도 토요일마다 산행하지?” “이 강아지는 한국 갈 때 데리고 가나?” 이렇게 두서없는 말들이 한참이나 오고 갔을 때, “배부른데 1시간 정도, 자유 시간을 가지면 어때요?” “좋지!” 누군가의 제안이 없었다면 수다는 아마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을 거다.
낚시, 산책, 카누 타기, 산나물 채취, 당구 등 각자 취향에 맞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맥주 취기가 올라와 야외 선텐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물끄러미 호수를 쳐다보았다. 선착장 근처가 얕은 모래 지역이어서인지, 카누를 타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간혹 유람선 같은 보트들이 지나가며 손짓을 한다. 밥 먹으며 누군가 말했던 “살다 보니...”라는 말이 지금 딱 어울리는 순간이지 싶었다.
사실, 이민 올 때는 이런 ‘그림 같은’ 세월을 그리며 왔는데, 실제 삶은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권진원이 부른 ‘살다 보면’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이 노래의 가사는 권진원의 남편, 유기환이 썼다. 1959년에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진주로 이사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진주에서 자란다. 아마 망경산과 남강이 없었다면 그는 문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다. 영어 시간에는 수학을 수학 시간에는 영어를 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독학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해, 한국 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에 입학한다. 대학 4학년 때 맞은 이른바 ‘오월 광주’는 그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그가 지적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바로 거리의 아스팔트 아지랑이 속에서 투쟁하며 보낸 꿈같은 한 해 때문이었다. 외무 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공무원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파리 8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지도 교수 자크 네프를 만난다. 그것은 행운이었고, 인생 좌표를 바꾼 계기가 된다. 네프 교수는 문학의 경우, 테제(*정/定)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미학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미학은 ‘미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공부하는 것이다. 즉 미술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역사이다. 세상을 보는 방향을 찾는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가장 공들인 분야가 글 쓰기다. 그 후, 다수의 불문학 관련 책을 썼고 모교에서 프랑스어과 교수로 일한다. 지난해에는 총장 후보로 선출될 정도로 중견 교수가 됐다.
‘살다 보면’의 작곡은 권진원이 했다. 그녀는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습작처럼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여고 시절에는 불어를 배우며 샹송을 즐겨 불렀다. 한국 외국어대 네덜란드어 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1985년에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해 자작곡 ‘지난 여름밤의 이야기’로 은상을 수상한다. 졸업과 함께 유기환과 결혼한 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가입해 민중가요를 주로 부른다. 1991년 함께 활동하던 안치환과 김광석이 탈퇴하자, 권진원도 <노찾사>를 그만두고 솔로 음반을 내놓는다. 당시 그녀는 노래 운동권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여성 보컬리스트였기에 <노찾사>의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다. 솔로 1집은 민중 가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해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지만, 2집 <살다 보면>이 히트하게 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다.
<살다 보면>은 결혼하고 6년쯤 지난 어느 날, ‘아, 도깨비방망이가 있어 뚝딱하면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면 좋겠다’라면서 그런 얘길 남편과 하다가 노랫말이 나왔다고 한다. 유기환이 쓴 노랫말은 글을 수채화처럼 표현하는 듯하다. 권진원의 외할머니는 함경남도 북청에 살았는데, 6.25 전쟁 당시 9살이던 딸을 시부모님께 잠시 맡기고 왔다가 분단으로 만날 수 없게 된다. 그 사연을 담아, 그녀가 작곡한 노래가 ‘북녘 파랑새’라는 곡이다. 그 외할머니 전초월이 바로 가수 전인권의 고모다. 그러니까 권진원과 전인권은 조카와 삼촌 사이다.
‘북녘 파랑새’의 사연을 알게 된 후, 권진원을 만날 일이 있어 “저의 어머니도 함경도 실향민이에요.” 하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1998년도인가, 그녀가 ‘개인 콘서트를 한다’며 초대권을 보내왔다. 방송사 예능 쪽에 근무하던 때라 그냥 홍보 삼아 보낸 것일 텐데, 아내와 함께 대학로에 있는 <학전>으로 공연을 보러 갔더니 너무 좋아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한참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카누 한번 타세요”하며 불러 눈을 떴다. 모두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덧 해님도 기울고 달님이 나올 채비를 한다. 한낮의 날씨가 27도를 넘었지만, 방안은 벽난로를 땔 정도로 서늘해 모처럼 장작불을 때는 낭만도 즐겼다. 세월도 변하고 생각도 변했는데, 장작 타는 냄새는 여전히 좋다. 이 장작 타는 냄새가 바로 삶의 냄새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