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친구가 “시간 있을 때 <들국화>의 최성원에 대해 한번 써봐. 학교 다닐 때 몇 번 봤는데 음악도 좋고 나름 철학도 있어”라는 말을 들은 지 벌써 여러 해다. 하지만, 나는 전인권 말고는 다른 <들국화> 멤버가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그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며칠 전 우연히 <들국화>의 1집을 듣고 ‘이렇게 좋은 음악이 1980년대에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들었네…’ 하며 서둘러 자료를 뒤졌다.
그룹 <들국화>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비틀즈>를 거쳐야 해야 한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그리고 링고 스타, 이렇게 4명으로 구성된 비틀즈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음악의 역사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들은 1963년에 혜성같이 나타났다가, 1969년 마지막 앨범인 ‘렛 잇 비(Let It Be)’를 발표하고 사라진다. 4명의 멤버들은 10대 시절에 하나로 뭉쳐, 20대 초에 슈퍼스타가 되고 그들 만의 역사를 만들어 내지만, 그에 따른 경쟁과 불화도 함께 겪는다.
그렇다면 20세기 최고의 음악 밴드 비틀즈는 어째서 7년을 넘기지 못하고 갈라서게 됐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이 1967년 8월 갑자기 약물 남용으로 사망하자, 자신들의 돈 문제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인간관계까지도 관리해주던 전문가를 잃게 되었다. 이후 밴드의 주축인 레논과 매카트니는 새로운 매니저 문제로 대립한다. 매카트니가 처갓집 식구들을 매니저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비틀즈 멤버들은 순회공연이 늘어나면서, 팬들의 환호 때문에 자신들의 연주 소리가 파묻혀 음악 활동에 지장을 받자, 라이브 공연을 중단해 버린다. 순회공연에서 생기는 안정적인 수입이 사라지자 비틀즈는 점점 곤궁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레논과 매카트니는 각각 16살과 15살에 만났다. 초기 비틀즈의 모든 노래들은 이 둘의 진정한 합작품이었다. 음악 가정에서 자라 작곡을 했던 매카트니와 달리 레논은 작곡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작곡을 배운다. 두 사람이 성장하면서 사이가 틀어졌을 때에도 애정을 가지고 서로의 스타일을 흉내 냈고, 서로 도와 노래를 완성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음악적 견해가 달랐고 그것은 악감정의 싹이 된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적개심은 결국 비틀즈의 해산을 가져온다. 이러한 분열은 곧 증오로 이어지면서 감정이 악화됐다. 깨진 뒤 레논은 ‘어떻게 자니?(How do you sleep)’란 노래에서 ‘네 예쁜 얼굴은 1년 이상 가지 못할 거야. 내 귀에 네 음악은 엘리베이터 배경음악과 같다’며 매카트니를 향해 노골적으로 악감정을 퍼부었다. 도저히 세기의 콤비였다고는 볼 수 없는 볼썽사나운 싸움이었다. 둘은 가치관도 전혀 달랐다. ‘참여적인’ 레논은 서구사회의 혁명 대열에 나선 신좌파였던 반면, ‘개인적인’ 매카트니는 별장에서 은둔하듯 지내며 세상일에 등을 돌렸다. 비틀스 해산 전후 10년 넘게 소원한 관계에 있던 둘의 사이는 1980년 존 레논이 피격 사망하면서 생전 공식적인 화해를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2001년에 조지 헤리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만이 남게 되고 비틀즈는 ‘불구’가 된다.
비틀즈는 기존의 로큰롤에 포크 음악의 감수성과 인도 음악 등 이질적인 다른 나라의 음악을 녹여 퓨전 시킴으로써 자신들 만의 음악을 만들었다. 비틀즈처럼 그러한 장르적 융합을 통해 독특한 음악을 만든 그룹이 <들국화>였다. 그들의 음악은 록이면서도 포크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연주나 선율이 훌륭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외국 록이나 포크를 따라가는 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독특한 형식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1980년대 대중음악 황금기에 완성된 한국적 포크를 부르는 토종 <들국화>가 자생된 셈이다. 어떻게 보면 해방 후 받아들여진 서구의 대중음악들이 서서히 한국화 되어 가는 흐름 속에서 <들국화>가 씨앗을 실체로 발화시킨 것이라고 해야 옳다.
<들국화 1집> 재킷은 평소 존경했던 비틀즈의 ‘Let It Be’ 앨범을 흉내 낸 것이라 한다. 왼쪽 위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전인권, 조덕환, 최성원, 허성욱.
2007년에 경향신문이 조사한 <한국 대중음반 명반 100>에 <들국화 1집>이 1위로 선정된다. 1985년에 만들어진 이 음반 표지에는 네 얼굴이 등장한다. 전인권,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이 비틀즈 ‘렛 잇 비(Let lt Be) 음반 표지와 꼭 닮은 배치로 자리하고 있다. 이 네 명 중에 두 명이 지금 세상에 없다. 막내이자 피아니스트인 허성욱은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었던 조덕환은 2016년에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결코 짧지 않은 대중 음악사에서 한 장의 음반을 고른다는 것은 무리하다. 더구나 현실보다 과대 포장되어 온 것이 과거이고 보면 결과물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들국화의 데뷔 앨범은 각자 역량을 충분히 갖춘 네 명의 뮤지션들이 만든 작품이다. ‘그것 만이 내 세상’에서 전인권의 절규, ‘매일 그대와’로 보여준 베이스 최성원의 감미로운 목소리, 허성욱의 절제된 건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에서 나타난 조덕환의 작곡과 노래. 그들의 노래는 마치 바람에 날린 들국화의 씨앗처럼 당대 청년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지고 퍼진다. 그러나 <들국화>는 2집 이후, 실망스러운 후속 작들과 잦은 멤버 교체 등으로 밴드의 호흡이 멈춘다. 조덕배는 벌써 팀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1987년 전인권과 허성욱이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되자, 최성원은 제주도로 내려간다. 거기서 쓴 곡이 성시경, 유리상자 등이 불러 명곡이 된 ‘제주도의 푸른 밤’이다.
1980년대, <들국화>는 TV에 출연하지 않는 밴드였다. 동아기획 조동진의 부탁으로 딱 한번 MBC에 출연했지만, 전인권이 장발을 풀어 헤치고 생방송에 나왔다.
최성원의 아버지는 클래식계에서 유명한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이다. 그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이가 고려대 문리 학과 1학년이었는데 졸업 후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으면 했어요”라고 한 언론에서 밝힌다. 사람들은 <들국화>하면 노래하는 전인권을 떠올리지만, 사실 이 밴드를 프로듀싱 한 사람은 최성원이다. 1집 중, 6곡이 그의 작곡이다. 각자의 꿈틀대는 개성을 가진 멤버를 하나의 색깔로 만든 것도 최성원이었다. 1954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휘문고와 고려대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준 기타를 독학해 밴드 하는 형들을 쫓아 녹음 세션과 라이브 연주를 다닌다. 이곳저곳의 밴드에서 활동하다가, 대학 졸업 후에는 CM 제작 프로덕션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2년경에 전인권과 허성욱을 만나 셋이서 <모노>, <환타지아>, <뮤직 라보> 등에서 밤무대를 한다. 어느 날 <따로 또다시>라는 그룹이 콘서트를 하는데, 게스트로 초청받는다. 그런데 제대로 된 이름이 없어 공연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들국화>라는 이름을 짓는다. 당시 전인권이 캐나다 밴드 <스카이라크(Skylark)>의 ‘Wild Flower(야생화)’를 잘 불렀는데,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주위에서 “남자 밴드 이름이 들국화가 뭐냐?”고 놀림도 당했지만, 최성원이 우겨서 계속 쓰게 된다.
들국화의 원년 멤버, 왼쪽부터 주찬권, 최성원, 전인권.
2집 이후 해체된 <들국화>는 피아니스트 허성욱이 죽으며, 1998년에 다시 재결합한다. 하지만, 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공연을 한두 번 하고 다시 소식이 잠잠해진다. 그 뒤 전인권이 밴드를 만들어 홀로 방송을 하지만, 그들의 전성기를 다시 찾기 어려웠다. 최성원도 음반 작업과 후배 양성도 했지만, 평생 TV에 딱 한번 나갈 정도로 ‘매스컴 알레르기 증상’이 있던 그는 대중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2013년에 미국에 있던 조덕환이 귀국해 다시 한번 재건을 하려 했지만,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조덕환은 그렇게 돌고 돌아 <들국화>로 다시 돌아왔지만, 2016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최성원이 작사, 작곡한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매일 그대와”의 노랫말처럼 함께 연주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매일 그대와’ 밴드 할 수는 어렵게 됐다. 하지만, <들국화>가 뿌린 씨앗은 세월이 지나도 시들지도 않고 봄마다 꾸준히 피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