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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수 Jun 25. 2022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2년 전에 고추, 상추, 깻잎, 파, 부추 등의 모종을 심었다가,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바람에 모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종 밭을 만드느라 2주 동안 땅 파고 잔디 걷어 내고, 그 고생을…’ 하며 다시는 모종 근처에는 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올해 그 기억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5월 중순에 날씨가 영상 18도가 넘어가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모종을 심었는데, 밤 기온이 영상 1~2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가슴 조이며 ‘단보루’ 박스로 간이 온실을 만들어 1주일 동안 덮었다가 펼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누군가 ‘농사는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새겨지는 1주일이었다. 다행히 고추 모종 몇 개만 죽었고 나머지들은 상태가 괜찮았다. 내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물을 주는 것과 기도뿐이다. 어제는 물을 주고 있는데, 담장 넘어 옆집 중국 할머니가 “니@쯔이 하오 ^ #? &% 으@쎠” 하며 소리친다. 내가 준 물이 튀어 버린 것인데, 내가 “쏘리” 했더니, 웃으며 “노 프로블럼” 한다.


 고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캐나다에서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기가 쉽지 않다. 언어나 문화, 음식, 습관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웃 할머니와는 3년 전에 그의 집 버드나무가 우리 마당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담장을 고치고 이것저것 상의하느라 가까워졌다. 7미터쯤 되었던 나무를 모두 잘라내고 담장을 다시 고치는데 4개월은 더 넘게 걸린 것 같다. 


토론토에서는 자기 마당의 나무가 쓰러져도 시청에서 나와 조사를 하고, 나무를 뽑은 장소에다 꼭 다른 묘목을 심어야 하는 규정이 있다. 물론 묘목 심는 비용은 시청에서 지원을 해 준다고 한다. 옆집도 그렇게 한 것 같은데, 그때 심은 나무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이번에 물 주러 뒷마당에 자주 나가며 담장 넘도록 커버린 나무가 라일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토론토의 라일락은 고국과 다르게 향기가 그리 강하지 않다5월 중순경에 피는데 보라색, 붉은색, 흰색이 있다. 라일락은 영어명으로 ‘푸르다’라는 의미의 아라 비어 ‘laylak’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리라꽃이라고 불린다. 몇 년 전에 어쩌다 어느 캐네디언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집안에 라일락 꽃향기가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이민 초에 콘도에 살았을 때는 바로 앞 방에 영국계 할머니가 살았는데, 항상 라일락 향내 나는 초를 켜 놓고 지내는 걸 보았다. 간혹 우리 집에서 된장찌개라도 끓이는 날에는 복도까지 나와 향내 스프레이를 뿌리고 들어 가는 모습에서 그들이 냄새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 사용하는 화장품, 비누나 샴푸, 방향제 등도 라일락 종류가 많다.

토론토의 라일락은 5월 중순에 피는데, 고국과 다르게 향기가 그리 강하지 않다.


라일락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윤형주가 1972년에 부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라일락 향기가 스며 있는 듯한 멜로디와 낭만적인 가사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라일락꽃 향기를 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이 노래는 원래 피지(Fiji) 사람들이 헤어질 때 부르는 민요였는데, 호주 출신 4인조 그룹 씨커스(The Seekers)가 불러 크게 히트를 친 것을 윤형주가 번안해 부른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윤형주가 의대생에서 통기타 가수로 인생의 향로를 바꾸게 되는 노래이기도 한데, 그의 지적 이미지에도 맞는 곡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번안하며 가사의 내용도 바꾸고 음률도 밝게 부르며 이별가의 맛이 변질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라일락 꽃은 지금처럼 조경 나무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그래도 낭만이 있는 대학 캠퍼스인데 라일락 꽃은 있어야지’ 할 정도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 시절, 라일락 꽃이 피면 달달한 향기가 퍼진 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생각나는 또 다른 노래가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다.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하는데”


이 노래는 이문세가 29세이던 1988년에 발표한 노래로 헤어진 연인과 추억을 떠 올리며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곡이다. 이문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색이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노래를 제대로 즐기려면 레드 와인을 글라스에 가득 채워 한잔 마시며 ‘시간 이동’을 해야 한다. 눈을 감고 라일락 꽃 향기를 맡으면 옛 기억이 되살아 난다.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이 나의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은 지금 나의 마음을 알까?’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이런 고백을 술술 하게 된다.


 이 노래는 이영훈이 작사, 작곡을 했다. 1960년생인 이영훈은 원래 연극, 방송, 무용 등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다. 그러던 중 1985년에 당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의 소개로 이문세와 만난다. 서로의 가능성을 알아본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한다. 6개월에 걸쳐 8곡을 완성하는데 그중 한 곡이 바로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였다이 노래는 KBS ‘가요 톱 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라디오 인기가요 차트에서 10주 연속 1위를 거머쥔다그 뒤, 4집으로 만든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은 업계 공식 기록으로 150만 장을 판매한다.


이영훈과 이문세는 최고의 작곡가와 가수 콤비로 불후의 명곡들을 만든다이영훈은 ‘한국적 팝 발라드’를 개척하고 완성했다. 클래식에 우리 정서를 섞어 휘젓고 빚어 한국 고유의 팝 발라드를 창조한다. 아름다운 가사로 대중성을 파고들면서도 품격을 유지해 고급스러운 대중음악을 내놓는다. 하지만, 순수한 음악적 영혼과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작업에 몰두하다가 몸을 해쳐 결국 대장암으로 47세에 짧은 생을 마친다. 

이영훈(오른쪽)과 이문세는 최고의 작곡가와 가수 콤비로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 등 불후의 명곡들을 만든다.


 그가 죽은 2008년 2월 14일 술집, 택시, 버스, TV, 노래방 등에서 이영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모든 라디오 디제이마다 아쉬움의 추모 멘트를 했다. 그는 수많은 노래를 작곡했지만, 평생 이문세하고만 작업했는데, “우리 관계는 말하자면 영화 <록키>에서 복서와 트레이너의 관계죠”라고 한 언론에서 밝힌다. 그가 좋아했던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과 우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짚어봐도 이영훈에게 이문세는 ‘라일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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