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있는 전 직장 동료들이 생일 축하 카톡을 보내왔다. 벌써 회사를 떠난 지 10여 년이 됐고, 같이 근무할 때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페이스북>을 하면 등록된 친구의 생일을 알려 준다. 이렇게 손가락 몇 번만 누르면 재미있는 캐릭터도 보내고 안부를 전할 수 있는 편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황 국장님! 어떻게 지내세요? 생일 축하합니다.” “아,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여기까지 쓰고, 다음을 어떻게 써야 할까 망설여졌다. 그래도 사표 쓰고 캐나다로 이민 떠날 때는 다들 부러워했는데, ‘나 요즘 백수야! 할 일 없이 아침 늦게 일어나 동네 산책하고, 집사람 눈치 보며 차려준 밥 먹고 있다’고 쓰는 건, 그나마 남아 있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 네. 요즘 취미 삶아 글도 쓰고 꽃밭, 고추, 깻잎 기르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며 선비(?) 노릇하는 듯, 두리뭉실하게 썼다.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 안 믿을 것 같아서 키우고 있는 꽃밭 사진을 첨부로 몇 장 보냈다. 조금 있으니, “아, 나팔꽃도 있네요?” 하며 답장이 왔다. 보내준 사진을 확대해서 면밀히 살펴본 듯하다.
지난해 지인이 준 씨앗을 봄에 모종 화분에 넣어 키웠는데, 나팔꽃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 싹 모양이 제법 커지며 나팔 모양이 나타나 그제야 나도 ‘나팔꽃도 있구나’ 했는데, 똑같은 생각을 그 동료도 한 것이다. 7~8월이 제철인 나팔꽃은 아침 일찍 꽃을 피고 해가 들기 시작하면 시들기 시작해서 오후가 되면 꽃잎을 닫는다. 그래서 2~3일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이 때문인지 나팔꽃의 꽃말은 ‘덧없는 사랑’이다.
덩굴식물인 나팔꽃은 지지대가 있어야 자라기 때문에 가는 줄을 나무에 매달아 주었더니, 잘도 타고 올라간다. 나팔꽃의 생은 비록 짧지만, 슬프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핀 꽃이 시들면 이어서 다른 꽃들이 피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고 지고를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하며 숨 가쁘게 살아가니 매일이 새롭다.
밤의 별과 바람과 달빛의 기운을 받아 새벽에 피는 나팔꽃은 아침의 소중함을 담아 ‘기쁜 소식’이라는 꽃말도 가지고 있는데, 소낙비라도 내리면 꽃이 이내 짓물러 버린다. 그래서 물을 줄 때도 꽃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줄기도 약해서 잘 끊어져서 바람이 거세게 분 다음날이면 여기저기 찢어져 있다. 그렇다고 그저 약하고 연약하지만은 않아서, 무엇이든 잡고 감으며 생존한다. 지지대가 높으면 높게, 낮으면 낮은 대로 잡은 것만큼 올라가서 넉넉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렇다고 올라갈 수 있다고 마냥 올라가지도 않는다. 바람을 이길 수 있는지, 꽃을 피울 수 있는지를 살피며 올라가서인지 오히려 땅을 향해 내려가는 줄기도 있다.
나팔꽃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난 6월에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국민 MC 송해 선생이다. 1927년에 태어나 코미디언으로 60여 년을 활동했다. 1988년부터 2022년까지 ’KBS 전국 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해 온 송해는 자신의 삶을 ‘나팔꽃’에 비유하곤 했다. 아침이면 피고 저녁에는 지었다가 다시 피는 나팔꽃 같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자신을 ‘딴따라’라 불렀다. 1955년 28세의 나이로 <창공악극단>에 들어가 단원이 됐고 1960년대 초에 방송계로 진출해 대중문화의 현장을 삶의 마지막까지 지켰다. KBS ‘가로수를 누비며’, MBC ‘웃으면 복이 와요’, ‘KBS 전국 노래자랑’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송해는 1950년 12월 3일의 황해도 재령에서 있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날 그곳에는 38년 만의 강추위가 몰아닥쳤고 눈발이 휘날렸으며, 어린 누이동생은 툇마루에 기대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발처럼 하얀 머릿수건을 두른 채 “얘야, 이번엔 더 조심히 해 가거라”며 당부했다. 며칠 전 까지도 인민군이 징과 꽹과리 치며 내려오면 그들을 피해, 옆 마을로 피해 있다가 오곤 했기에, “별 일 있겠어요, 하루 이틀 있다가 올게요”하며 집을 떠났다. 그 길이 어머니와의 영영 마지막이 되었다.
인민군을 피해 간, 해주 바닷가에서 운 좋게 미군의 보급선을 얻어 타고 연평도로 간다. 다시 해군 LST(상륙함)에서 3~4일 망망대해를 지내고 보니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때 배 위에서 ‘송해(宋海)’라는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줄인지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훈련소로 입대한다. 통신병으로 육군본부에 배치받아 전쟁을 치르고 1953년 7월 27일 군사 기밀 암호 전문을 예하 부대에 타전한다. “7월 27일 22시를 기해 모든 전투 행위를 중단한다”라는 휴전 전문을 확인하며 동료들과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집에 갈 수 있다고, 어머니의 동그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한을 풀지 못했다. 실향민이던 그는 평생 통일과 고향을 그렸다.
2014년 4월의 일이다.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개성공단 잔류 인원이 귀환하는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송해의 ‘나팔꽃 인생 60년 빅쇼’가 열리는 날이었다. 송해는 이날 공연을 취소했다. “관객 중 상당수가 실향민인데, 개성 공단 철수로 남북 관계가 경색된 상황 속에서 노래하고 춤 출수가 있겠냐”며 공연을 접은 것이다. 당시 그는 언론의 인터뷰를 피하고 침묵했다. 남북 관계의 경색은 고향과 어머니로부터 더욱 멀어졌다는 상실감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022년 1월 개최된 송해의 마지막 공연, ‘고맙습니다, 송해’ 콘서트에서 그가 직접 오프닝으로 부른 노래 ‘나팔꽃 인생’이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는 송해와 ‘전국 노래자랑’을 녹화하며 전국을 함께 돌아다녔던 작곡가 신대성이 만들고 김병걸이 작사를 붙였다. 노랫말에서 보듯 그는 분단과 실향의 역사를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았다. 지금쯤 송해는 평생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저승에서 만나,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너무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저도 지치고 어려울 때마다 나팔꽃을 보며 힘을 냈습니다”라고 말했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