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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Oct 05. 2018

미국에서의 첫 아르바이트

서점 현금 계산원

#시간은 바야흐로 2013년 

    지금으로부터 약 5년전의 일이다. 2013년 봄에 한국에서 미국행을 택했고, 신혼의 단꿈은 생각외로 후루룩 날라갔다. 현실 세계에 눈을 떠 보니, 내 손에 담겨진 것은 무한한 시간, 외로움, 적적함, 적막함, 막막함이었다. 뭔가 일을 시작은 해야겠는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무엇이라도 해 보자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공고가 나는 곳은 다 넣었다. YMCA 안내 데스크에 서류를 넣었고, 인터뷰까진 했는데 취직은 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살았던 곳은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소도시였다. 오클라호마 하면 주도State Capital인 오클라호마 시티가 있고, 거기에서도 몇시간이나 차로 달려야 도착하는 곳. 이 도시에 스타벅스가 한 개 있고, 그나마 있는 그 스타벅스에 앉을 자리는 대 여섯개가 전부다. 한국에서 인문학으로 석사를 했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내 졸업장은 말그대로 '@나 줘버려' 였다. 사실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도 엄청난 눈물을 쏟았다. 낯선 땅에서 '이전의 나'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외로 쓰라렸다. 미국으로 오기 전 한 가까운 분의 단단한 조언이 있었다. "미국에 가려면 정말 바닥일부터 하는 걸 각오해야 할거야." 그때 난 뭐에 홀렸는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언니! 전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청소도 할 수 있는걸요!" 호언장담을 민망할정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과 실천은 이토록 천지차이였다. 

    워크퍼밋Work permit이 나오자, 집에서 혼자 이렇게 징징대는 것보다는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 보리라는 마음으로 지원을 했고, 결국 한 커피숍이 딸린 서점에 캐셔Sales Associate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갈 때 내 보직은 커피샵 바리스타. 서점 캐셔는 미국에서 시작한 나의 첫 일이다. 파트 타임이었다. 

    돌아보면 이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흑역사 그 자체다. 이 일 이후로 했던 일 중, 이처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고 물리적으로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흑역사를 공개한다. 


#바리스타인 줄 알았건만 아니 왜 내게 화장실 청소를?

    분명히 처음에 들어갈 때 내 자리는 바리스타였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던 이십대 중반의 백인 매니저 여성은 얄궂은 핑계를 대며 캐셔를 먼저 해 보라고 했다. 서점에서 일을 한다길래 그래도 잠깐이라도 책 표지라도 읽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건만 그것은 너무나도 순수한 착각이었다. 주된 내 자리는 당연 현금 계산원 자리였다. 바코드 찍고, 돈 받거나 카드로 계산해주고 봉지에 담아주고...... 그 중에서 가장 초반에는 하기가 살짝 두려웠던 것은 체크를 기계에 넣어서 돌리기. 미국에서 처음 본 체크. 수표라고 번역을 해야 하는거겠지? 이것도 몇번 하고 나니 익숙해졌다. 이같은 기본적인 일 외에도 단순 노동들은 차고 넘쳤다. 이 서점에서는 DVD, 3D DVD, 게임도 팔았다. 그래서 10시에 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대여한 뒤 반납한 이 디브이디들을 다시 정렬해 줘야 한다. 팝콘 기계도 있어서, 팝콘이 떨어지지 않게 해 놔야 한다. 또 서점 밖에 우체통같은 게 있는데, 이는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대여한 디브디를 차로 운전해 이 통에 넣을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러면 일하는 사람인 나는 바구니를 들고 나가 이 통을 연 다음 통 안에 들어있는 디브디를 수거해 오는 게 일이었다. 나는 주로 밤까지 일하는 경우가 종종있었다. 그러면 일에서 준 앞치마를 입은 채로 건물 밖으로 나와 Drop Off 박스에 서서 오클라호마의 검은 밤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돌렸다. '처음 시작한 일인데 쉽지는 않구먼' 그러면서 시간당 8불을 생각했다. 이같은 단순 노동도 육체 노동이라 온 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쉬는 날에도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그런데 더 힘든건 사실 따로 있었다. 


#일 안하는 그대들, 혼자 있는 나 

    나를 포함한 나같은 캐셔Sales Associate들은 10명 내외였고, 그 위에 Sales Administrator가 서너 명 있었고, 가장 위에 Store Manager가 있었다. 스토어 매니저가 앞에서 하얀 얼굴의 이십대 여성이었고, 나를 면접본 사람이었다. 이 당시 여기서 일했던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봤을까? '말은 잘 안하고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전부이지 않았을까? 나도 초반에는 이 열댓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친해 보려고 말도 걸어보고, 어색하지만 되돌아오는 답이 별 게 없어도 또 다시 말을 걸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뭐랄까,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미국이라는 문화에 한참 적응 중인 새내기였고, 그들은 미국 사람이라서 그런것일까? 언어 장벽? 구체적으로 딱 그 이유를 꼬집을 수가 없다. 확실했던 건 나는 소처럼 일만했고, 나와 같은 입장의 다른 이들은 끝없이 수다를 떨거나, 설렁 설렁 일을 하거나,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 나의 '소처럼 일하기'의 정점은 남자 화장실 청소에 다달았다. 스토어 매니저 밑에 있으며 나를 관리하던 A가 있었다. 그녀 역시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싱글맘이었다. 그나마 그녀는 그래도 일을 좀 합리적으로 처리한다고 생각했건만, 한번은 내게 가게 문을 닫기 전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며 내게 자신이 여자 화장실을 할테니, 너는 남자 화장실 담당해. 말하니 내가 또 뭐라고 대꾸하리. 우웨웩. 남자 화장실 변기 청소는 그야말로 오물을 뒤집어쓰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최악이었다. 나도 미련했지. 그냥 머리를 써서 대충 닦는 흉내만 냈어야 하는건데, 그걸 그렇게 닦고 있었다. 솔직히 남자 화장실을 나오고 나서 난 이 일을 오래 못할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말그대로 Sales Associate에 대한 처우가 이건 아니었다. 소처럼 일한 내 노동을 인정 받지 못했고, 스토어 매니저에게 알랑방구를 뀌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배울 게 없었던 매니지먼트, 직원을 대하는 태도 

    나를 뽑아준 그녀 A는 사람은 괜찮은것 같은데, 매니저로서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개인적 성향과 감정을 일에 개입했다. 예컨대, 자신과 친한 사람들에게 먼저 자리를 줬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캐셔로 일을 하다, 나는 그녀에게 커피숍 일로 바꿔 달라고 말했다. '처음에도 그 자리에서 일하기로 한거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내게 그 일을 주었다. 그리고 당시 2주 반을 쉬었다. 파트 타임 자리는 직장에서 보장해주는 것(의료 보험 등)이 없기에 그만큼 법적으로 나의 휴가에 대해서도 2주 반이나 쓴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휴가를 쓰고 돌아왔더니 매니저 왈, '너가 휴가 갔다 와서 커피숍 일 까먹었을 수 있으니까 다시 캐셔 일 하렴'. 정말로 빡치는 말이었다. 왜냐면 나처럼 커피숍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10년 전에 이 커피숍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했던 경험을 이유로 고용되자마자 커피숍에서 쭈욱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마이, 갓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나중에 알고보니 나와 같은 Sales Associate 남자 B와 연애를 하는 사이였댄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B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것인지 뭔지 친구들이 여기에 와서 물건을 사면 다른 것들을 추가로 싸게 해 준다거나 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러 결국 해고되고 말았다. 


#사람 마음

    약 사개월 간의 경험이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저런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매니저님의 좀 어이없는 경영에 더이상 시달리기 싫었다. 이 매장에서 일했던 (내게 남자 화장실 청소를 시켰던) A를 우연히 어느 날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TJMAX라는 의류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인사를 할까말까 고민이 되었다. 그다지 좋은 기억도 없는데 왜 굳이....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또 그렇다고 굳이 피할 필요는 없지.' 하는 마음에 말을 건넸다.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래, 이 아시안이 척박한 소도시에서 나를 기억못하진 않겠지, 이 냔아.' "어때? 여기서 일하니 좋아?" "어어. 여기가 훨씬 낫지. 그럼. 거기 문 닫은거 알아?" 그렇다. 거긴 결국 망했다. 대화를 해서 알고보니 A에게도 그 곳은 흑역사의 공간이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다. 어려운 경험이었지만 이게 없었다면 아마 나는 그 후로 내가 겪은 꿀알바같은 일의 소중함을 몰랐을것 같다. 또한 이같은 '첫주사'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의 내 '위상'을 생각하며, '아, 한국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는데 말이야!'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듯 싶다. 터널을 통과하듯, 감기 주사를 한방 딱 맞듯, 그때는 무척 아팠던것 같은데 결국 그것이 있었어야 또 다른 인생의 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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