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편
이 사진은 내가 막 오클라호마 이니드에 도착하여 해가 바뀌고, 우연히 기회가 찾아와 그 기회를 콕 문 것을 기념한 사진이다. 남편이 일하는 부대에서 부대 배우자를 위한 장학금을 주는데 뽑힌 것이다. 장학금을 신청하는데에는 에세이를 써야했다.
장학금은 이천불. 이백만원이었다. 야호! 공짜돈이 생겼음을 기뻐하며 수표를 받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을 우습게 보아선 안되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순진했거나...... 장학금을 담당하는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느 학교로 보내면 되죠?" 뜨악. 사실 당시 나는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긴 했지만, 학교에 등록한 상태는 아니었다. 부랴부랴, 이리저리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알아보는 중 그닥 원치 않는 답만 돌아왔다. 내가 원한 공부는 교사일이었기 때문이다. 국문학 석사 학위가 있으니 언젠가는 미국에서 정식 한국어 교사가 될 수 있다고 희망했다. (그 '언젠가는'은 여전히 지금도 내게 '언젠가는'으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군인의 아내로 한인 여성의 커리어 생존기'라는 글을 통해 밝히겠다. 거창하지 않으나 요점은 하나다. 군인은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에 한번씩 타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잦은 이동을 하면서도 선생일 유지가 가능한가......)
아니, 어디서 그런 용기와 담대함과 무모함이 또 다시 나왔는지 모르겠다. 분명 내 혀는 한국어-서울말을 따라하려한 흔적이 있을 것이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있을 것이고, 또 이 년간 죽어라 우크라이나에서 살면서 공부한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의 억양과 발음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영어였다. 그 영어로 미국 본토에서 미국 본토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눈이 동그래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왜 나는 초등 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을까? 당시 정보력이 없었으나 내 주변을 보니 군인 아내들이 직업 갖는것은 무척이나 쉽지 않고, 그나마 하는 일들이 간호사 아니면 교사가 미국 전역에 널려 있으니, 이 직업은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미국 본토에서 나고 자란 현지 미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떤 나의 적성과 핵심에는 맞는 일이긴 했다. 아이들을 만나고, 또 대중 연설이라고 불리는 스피치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지금은 자격증을 따는 일이지만 먼 훗날에 한국어가 미국에서 스페인어처럼 강력한 제2외국어로서의 힘을 갖는날 이 자격증으로 나도 한국어 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그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짜자잔!
이 학교에 들어갔다!
라고 쓰고 싶은데 그러질 못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내가 찍었다. 그것도 내가 살았던 이니드에서 장장 오십분을 혼자 차를 몰고 가서 말이다. 사진을 저장한 폴더명은 '나홀로 셀프 캠퍼스 투어'다.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학교를 정해야 겠는데, 우선 전공이 정해지고 나서 학교를 살펴보니 우리가 살았던 도시 이니드에서는 딱 한 곳 바로 이 학교였다. 나는 매일 차로 이 학교에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그래서 시험삼아 한번 운전을 해 본 것이었다. 와우, 상당히 멀었다. 미국 시골길에서 차로 50분이라고 하면 아주 아주 영영 멀게 느껴진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잔디와 소와 먼지다. 이 길을 내가 매일 오가면서 공부도 하고 남편 뒷바라지도 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짜잔!
우리의 선택은 Virtual Student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기로 했다.
김이 빠지긴 했다. 삼십대이긴 해도 그래도 교실에 앉아서 반짝이는 눈동자로 교수님의 말을 받아 적으며 열심히 학우들과 토론도 하며 영어를 부쑥부쑥 키워올리고 싶다던 나의 야망은 무너졌다. 대신, 컴퓨터 화면을 앞에 두고, 열심히 키보드를 꽝꽝 소리내면서 문장을 만들고, 책을 읽고, 시간에 맞춰서 글을 올리고, 답글을 달고, 교수님께 질문을 하는 좀 지루하면서도 또한 열정이 없으면 헤낼 수 없는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제 글의 밧줄같은 독자가 되어주세요. 독자1천명 만들어 책으로 내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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