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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매거진_#16] 퇴사 1주년 (아니 벌써?)

#자발적백수라이프

by 달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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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지 1년이 되었다.

1년이 지나도록 생존(?)해 있음에 감사하며 1년간의 백수 생존기를 작성해볼까 한다. 별도의 마일스톤은 없었지만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하다 보니 어찌저찌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자발적 백수를 어여삐 봐주시고 도움을 주신 주변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마치 자발적 백수 은퇴 선언 같지만 아쉬워마시기를. 자발적 백수 라이프는 현재진행형(ing)입니다.

감사히도 무탈하게 1년을 잘 보냈다.

1년 정도의 짬이 되니 한 래퍼의 말처럼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생긴 것 같다. 즉, 어려운 날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나름의 여유가 생겼다라고나할까. 역시 백수는 한없는 느긋함이 유일한 무기지. 그런데 요즘 세상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여유 없는 것이 백수인 것 같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사는 것이 팍팍해졌다는 것 아닐까.

최근 서울의 곳곳은 노조 농성과 각 이익집단의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다. 어찌 보면 현대판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심한 사회적 혼란이 도래하였다. 그런 시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힘든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작년, 퇴사 결심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삶이 불행했다.
목적과 이유가 없었고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일각에서는 존버정신이 부족하다며 근성 없는 나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내 인생이니 신경끄쇼하고 퇴사를 내지르고 나왔다.

당당하게 나오긴 했는데 사실 그다지 대책이 없었기에 시행착오가 많았다. 그리고 시행착오도 아직 현재진행형.

솔직히 사표던질때야 후련했지-

던지고 나면 막상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르겠기에 많은 백수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적성 찾기를 해야 하는 거지? 사실 죽기 전에 자신의 길을 찾은 사람이 운수 대통한 거라 생각한다. 그만큼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은 어렵고도 머나먼 길이다. 우리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여행자이다.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지만 그래도 백수 특유의 태평한 마음으로 첫 몇 달은 해피 모드로 잘 지냈던 것 같다.

통장의 잔고도 나름 나를 든든하게 해주었다랄까. (상대적인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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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니면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질문은 하나였다.

정말 이게 다인가? 다란 말인가?

우리의 인생이 정말 이게 다란 말인가.

취업 하나 바라보며 살아왔던 인생의 마지막 허들을 넘고 나니 큰 허무함이 밀려들어왔다. 그 허무함을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더 큰 공포감이 밀려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열고 들어간 사회라는 세상은 더욱 높은 허들로 채워져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타인을 배려하며 살라는 이타주의를 배웠는데 웬걸, 사회에 나오니 남의 등을 처먹고 살아야 했다. 그 잔인한 사실에 익숙해져야 했다. 나를 스스로 챙기며 하루를 살아나갔지만, 이기적인 하루를 보낼 때마다 깊은 내면에서 저항감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무한 경쟁시대에 나가떨어진 낙오자의 변명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이게 세상이 만들어진 논리이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리저리 많이 고민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고 또 딱히 뭐 답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은 단순 명료해서 이게 아닌데 왜 계속 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퇴사했다.

구구절절 길게 썼다만
존버를 실패하여 튕겨 나온 것이다.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불행하게 월급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적게 벌고 아껴 쓰며 내가 의미 있어 하는 일을 하며 가치있게 살고 싶었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차차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자발적 백수의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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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니 기력을 앗아아는 에너지 드라큘라로부터 작별하여 그 자체로 일단 행복했다.

부정적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인 편인데 자신의 일을 은근슬쩍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는가 하면 내로남불 마인드로 둔갑해있어 함께 일하기 곤욕스러웠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게 베스트셀러 처세술 책에서 말하는 꿀팁이지만,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란 얼마나 멀고도 험난한가. 위인이 되지 못하였던 나는 괴로움의 노예가 되었고 마인드컨트롤에 실패하여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CEO라면, 누가 조직 내에서 에너지 드라큘라 역할을 하고 있는지 철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산성 저해가 사실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편이 많기 때문이다. 내 주위만 해도 일 때문에 힘들다는 사람보다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지인이 훨씬 많다. 물론 좋은 사람을 뽑아 일류 회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자신의 좋은 면모를 뽐내러 각오하고 오는 면접에서 이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즉,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는 사람을 채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리더가 나서서 생산성을 저해시키는 일원에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설득하여 잘 이끌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에 사람으로 흥하고 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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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것은 케미가 있기에 결국 나도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

회사는 결국 나오게 되었다.
2018년 8월 16일

나오고 나니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모든 시작은 끝이며

동시에 끝은 시작이기도 하니

어찌 보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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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어쩔 건가?

나만의 백수 매뉴얼에 입각하여, 일단 첫 한 달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나가기로 한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못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달성해나간다. 이 시기의 백수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면의 열정이 심폐소생술로 살아나게 되는 기적을 목격한다. 다시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는 이 시기에는 매도 약도 소용없다는 '백수최고사상'에 물들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사실 돈 떨어지면 바로 없어지긴 한다.)

이때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뭘 하든 내가 원하고 계획하니 흥이 나서 모든 일들이 신이 났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직에 대한 생각은 1도 하지 않아다. 어떻게 나온 회사인데 벌써 이직이라니..?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질렀으니 행복하기라도 해야지. 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축제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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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은 무척 속이 탔을거다.

너 왜 그러니?라고 묻고 싶었겠지

그런데 엄마 나도 사실 잘 몰라요.

근데 이게 아니라는 거는 잘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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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 부모님 심정이 저 에어컨 같지 않았을까?

사실 부모님은 늘 곁에서 믿고 기다려주고 계신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또는 무서운) 일인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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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택이 행동으로 발전하고,
행동은 습관이 되어,
그렇게 형성된 습관은 우리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퇴사 후,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나가며 살고 있다.

백수매거진에도 쓴 것처럼 그동안 갖고 있던 나쁜 습관들을 없애고 아침형 인간 되기 프로젝트, 손톱 물어뜯지 않기 등을 해내고 있고, 자기비난을 하지 않고 현재에 존재하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무언가가 되어서 혹은 무엇을 가져서 행복하기보다는

그저 존재함으로써 행복하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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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계속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운 상상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현실로 돌아와 있는 그대로의 지금에 충실하려 한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할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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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나니 사람들이 모두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해준다.

단순 퇴사를 해서 좋아졌다기보다는, 나를 찾아가는 길을 걸어가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기에 낯빛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바라보며 불안해하지 않는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니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해나가는 나의 모습이 좋다.

한없이 고꾸라져도 다시 한 번 하며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모두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며 일어난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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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을 그동안 붙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왜 나는 이리도 괴로운가를 원망했었다.

무지의 상태에서 느리게나마 조금씩 벗어나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결국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만들어진다.

고통이 오더라도 그 고통을 고통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혐오하고 원망하고 증오한다면, 오히려 고통을 키워나갈 뿐이다.


만물은 변화한다. 즉, 만물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곧 사라질 고통에 화를 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절대 나에게 생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음의 여유가, 그리고 끈기가 조금씩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단단한 굳은살이 될 때까지 마음을 단련시키면 다가오는 고통에도 크게 아파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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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내 마음대로 되지 못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이다.

백수 1년 차.

아직도 무엇이 될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으나

하루의 밀도가 높아졌고

농축된 시공간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현재의 내가 많이도 행복해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꾸준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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