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시계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몸이 아는 시간. 5년째 글을 쓰지만 여전히 일어날 때 자동기립은 안 된다. 아마 더 나이가 들어도 안 될 듯싶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해 온 덕에 이제는 당연해진 아침 일상이다. 방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다. 자동기립이 안 되는 나와는 달리 옆 동네 참새(요새 봉황의 '봉'이 되기 위해 매사에 열심이다) 동반자는 살금살금 조용히 일어나 이미 새벽 조깅을 나간듯하다. 지독하게 달콤한 피곤함으로 쉽사리 눈이 떠지지 않는다.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본다. 약간의 근육통과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 뻐근한 허리 통증, 묵직한 다리로 보아 오늘은 조금 더 침대와 스킨쉽을 해야 할 것 같다. 잠시 잠을 더 청해야 하나. 하지만 내 머리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점점 또렷해진다.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올라 침대 위로 떠오를 것만 같다. 어제의 감동이 서서히 밀려와 내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2028년 <한국 OTT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은 '네플리즈'의 "우리들의 슬기로운 브런치생활 11월 25일 그 후"입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들의 슬기로운 브런치생활 11월 25일 그 후'는 박작가씨의 브런치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총 12부작으로 두 번에 걸쳐 방영되었던 이 드라마는 다양한 사람들의 브런치 일상을 코믹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그 속에서 생기는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해 시청자들로부터 공감을 받았습니다. 드라마 속 다양한 인물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한번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호평을 받았는데요. 각 인물들에 대한 애칭 만들기가 유행이었고 악역조차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뜨거운 반응에 시즌제 요청이 쇄도하고 있죠.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여러 예술문화 장르에서 매번 빠지지 않는 큰 주제이지만 특히 이 드라마에서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간의 다양한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까지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올 한 해 뜨거웠던 OTT드라마계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누워 있는데도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지를 않는다. 어쩌나. 그렇지만 입꼬리가 더 올라가 귀에 걸려 입이 찢어진 대도 몇 달은, 아니 평생 괜찮을 것 같다. 누가 보면 좋은 꿈이라도 꾸는 줄 알겠다. 혹시 꿈인가. 내가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어 남들도 하는 팔을 세게 꼬집어 본다. 그럼 그렇지. 현실이다. 이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급기야 덮고 있는 구름이불을 얼굴로 끌어올리고 소리도 질러 본다. 그러다 놀라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들어온 고딩 아들이 놀라 일어날 것 같아 이 사이로 두 입술을 넣어 앙다문다.
미치게 달콤한 여운을 만끽하느라 새벽이 가는 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창밖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들어오려고 기웃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여운은 여운이고, 밤을 거쳐 새벽을 지나는 사이 어제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된 것 같아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고요한 방 안으로 새소리가 하나둘씩 모여든다.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속을 포기할 수 없어 미적거리다 모로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붕 떠오른 풍선 같은 마음과는 별개로 수상 후 드라마 팀과의 회식 때문인지 여전히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오늘의 스케줄을 점검하며 머리를 리부팅하는 중, 문득 어젯밤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참, 꿈을 꾼 것 같은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꿈을 되돌려 본다. 아슴푸레하다. 그래도 간간히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이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다가도 자꾸 내 머리를 맴도는 것이 마치 내가 기억해 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생각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잘 보이지 않는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듯 연속 재생한다.
아침 7시 30분. 연속 재생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기지개를 쭉 펴 본다. 내 위에서 조용히 자고 있는 구름을 걷어 내고 잠시 숨을 고르고 거실로 나간다. 피곤한 몸에 비해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꿈 탓인가. 버터크림을 두른 듯한 묵직한 벨벳 커튼을 걷자 뽀얀 속살을 자랑하는 생크림 시폰 커튼 위로 이 때다 싶게 쏟아져 들어오는 초겨울 햇살이 나를 반긴다. 들어오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 마냥 아주 신나 한다. 나 역시 따뜻하지만 상쾌한 햇살을 마중 나간다. 넓은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산들은 울긋불긋한 옷을 하나둘씩 벗고 겨울 준비를 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보여줬던 다양한 퍼포먼스를 모두 끝내고 이제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서울이지만 시야가 탁 트인 듬직하고 푸른 산을 배경으로 자연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는 이 공간은 2년 전 구입한 집이다. 작은 작업실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의 새벽 글쓰기는 나에게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 사이 남편은 새벽 운동에서 돌아와 테라스에서 홍차를 앞에 두고 인터넷 신문을 보고 있다. 며칠 동안 쌀쌀했던 날씨가 풀렸나 보다. 창문으로 나를 발견한 남편은 통유리창의 옆문을 밀고 들어오며 마치 자신이 상이라도 탄 것인 양 호기로운 목소리로 묻는다.
"잘 잤어? 다시 한번 축하해. 어제 많이 피곤했을 텐데 더 푹 자고 나오지 왜 나왔어? 정국(가명)이도 토요일이라 늦잠 잘 텐데."
"당신 큰 일도 해냈고 요새 많이 피곤했는데 우리 휴일 동안 정국(가명)이 데리고 제주도 별장에 가서 쉬었다 올까?"
요새 남편의 사업이 안정국면에 접어들면서 안 그래도 괜찮았던 나에 대한 배려심이 연일 상한가다. 5년 전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마인드가 많이 바뀌었다. 집안일하면서 글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더니 내가 밤잠도 줄여가면서, 집안일에 소홀하지 않게 시간 쪼개 가면서 글 쓰는 것을 알고는 태도가 바뀌었다. 저러다 얼마 안 가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당장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애쓰는 게 측은해 보였는지, 가족 간 의리 때문이었는지, 집안에 없는 혹시 모를 봉황 탄생을 예감했었는지, 미래의 셔터맨을 기대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조를 한 번 해보겠노라 선포하더니 그 후 사명감을 갖고 이제 막 첫발을 뗀 나를 열심히 도와주고 응원해 주었다. 이전에도 아이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회사일로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도 짜증 내지 않고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고 공부를 봐주거나 문제상황 발생 시에도 나보다 먼저 달려갔다. 남편의 외조 덕분인지, 가족 외에 글쓰기만 생각하며 무조건 써 내려간 덕분인지 아리송하지만 1년이 지난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출판 제의가 들어왔고, 감사하게도 내 이름을 달고 나온 첫 번째 책은 한 달 만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더니 지금까지도 독자들이 찾아주는 스테디셀러 대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5년 동안 다섯 권의 책이 나왔고 그중 한 권은 네플리즈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되어 어제 작품상을 받는 영예까지 안게 되었다. 현재 시즌2까지 나온 상태이고 내년에 시즌3 제작에 들어가기로 계약이 된 상태이다.
"미안해, 여보. 오늘은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안 돼. 다음 주에 가자. 내가 저번주에 모임 있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아, 그렇지. 깜빡했어. 그 모임엔 빠지면 안 되지. 다음 주에 갑시다."
오래간만에 한가하다며 약속 장소인 00 호텔까지 데려다주고는 남편은 정국(가명)이와 며칠 전 예약한 미슐랭 맛집으로 외식을 하러 갔다. 약속시간 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호텔 대연회장 입구에는 '슬초 브런치 2기 5주년'이라는 골드빛 커다란 문구가 파스텔 블루 컬러를 바탕으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벌써 도착한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라라앤글의 나대표님을 비롯해 책만 내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동기님, 유명한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동기님, 조앤롤링을 뛰어넘는 판타지소설로 해외에 한국을 알리고 있는 동기님, 인기 드라마 집필 중인 동기님, 작가활동과 해외봉사활동으로 선한 영향력을 부여하고 있는 동기님, 글 써서 번 돈으로 국내의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 큰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기님, 여행작가로 해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기님, 끊이지 않는 러브콜로 쉼 없이 일해 건물주가 된 동기님, 작가이지만 감탄을 금치 못하는 탁월한 말솜씨로 천만 구독자를 끌어들인 글쓰기 유튜브를 운영 중인 동기님, SM과 가수계약까지 한 동기님 등등 2기 동기들은 각계각층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모두가 바쁜 일정 속에도 특별히 오늘 모임만은 빠지지 않으려고 작정들을 한 것 같다. 드레스 코드는 블루와 골드의 조합. 조금 있으면 이곳 대연회장은 아주 보통의 평범한 글쟁이들 같지만 보면 볼수록 화려하고 지극히 감각 있고 세련된 각각의 색깔들로 채워질 것이다. 동기들의 모습을 보며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 박작가! 우슬브 1125."를 외치며 어제의 작품상 수상을 축하하는 멘트를 날려 주었다.
시상식에서 생각했었다. 수상 후보에 오른 내 작품이 상을 받는다면 내 글(작품)을 사랑해 주는 독자들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쓰며 살고 싶다고. 글쓰기를 시작하게 해 준 이은경 선생님과 지난 5년 동안 글을 쓰면서 보통 이하일 때나 이상일 때에도 늘 한결같이 나를 위로해 주고 도움을 주었던 '우리의 슬기로운 브런치생활 1125'를 있게 해 준, 슬브2기 동기들에게 이 작품과 영광을 바치고 싶다고.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한 글쟁이가 되고 싶다. 글쟁이가 글장이가 되는 날까지.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질수록 오래된 비디오 필름이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살랑살랑 뺨을 간질인다. 어디선가 바다색인지 하늘색인지 모를 비눗방울들이 계속 뿜어져 나온다. 금세 없어질 것 같던 비눗방울들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내 주위를 가득 메워 나를 하늘로 밀어 올린다. 빼곡한 비눗방울들 사이로 저 멀리 반짝반짝 금빛가루로 치장한 무지개가 보인다. 그림책에서 보는 일곱 색깔 무지개가 아닌 다양한 색깔들이 오묘하게 섞인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벽화처럼 눈에 들어온다. 금빛 가루들에 너무 눈이 부셔 손그늘을 만들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 그곳을 바라본다. 점점 커지는 비눗방울들에 떠밀려 나는 자연스럽게 무한한 빛을 발하고 있는 무지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곳.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