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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Nov 24. 2023

김장 말고 월동준비

---털덧신과 목수건, 그리고 목 긴 양말

새벽에 눈을 뜨니 오른쪽 목구멍 윗부분이 평상시와 같지 않다. 싸한 것이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따끔하다. 어, 목감기인가. 엊그제 아이가 목이 많이 부어서 병원에 다녀왔었는데 옮은 것인가. 다행히 아이는 열이 심하게 나지는 않았다. 이틀 정도 목구멍이 붓고 아프더니 지금은 코로 옮겨가 누런 코 양산으로 코 푸느라 정신이 없다. 비염도 있는지라 콧물이 줄어드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열만 나지 않는다면 식염수로 코 세척을 자주 해 주면 큰 무리 없이 잦아들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요새 많이 피곤하기는 했다. 들쭉날쭉한 환절기 날씨와 집안일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 도전하는 일까지 하다 보니 몸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게다가 갑자기 추워진 11월 날씨에 두 어깨는 자꾸만 신분상승을 꿈꾸며 한없이 올라만 갔다. 물 먹은 양 온몸이 축축 처지는 여름도 싫지만 옛날 SF영화에서나 보던 관절꺾기로봇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 겨울은 더 싫었다. 안 그래도 저질체력이라 겨울엔 에너지 소모도 더 심하다. 요즘은 에너지가 한계치에 다다르면 그에 따라 몸에서 반응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아이 낳고 그간의 몸 상태의 변화를 되짚어 보니 스트레스가 심하면 극심한 위통과 계속되는 두통으로, 육체적으로 힘들면 편도선이 심하게 붓거나 인후 통증, 잇몸 들뜸, 입술 터짐으로 몸이 안 좋다는 신호를 내게 보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 낳고 키울 때에는 내 몸을 돌볼 틈도 없었지만 이제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니 몸이 보내는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게 된다. 작은 타박상이나 찰과상에 이상하리만치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몸의 모든 감각이 통증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아마도 아이가 어릴 때에는 모든 감각이 아이를 향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엔 아이가 커 가면서 과몰입에서 빠져나온 정신이란 놈이 그제야 지쳐가고 있는 몸뚱이가 보내는 힘든 내색을 알아차리고 있는 게 아닌지. 아니 어쩌면 갱년기라서 그런 것일까.



신혼 초 설 명절에 시댁에 내려가 아침을 맞이하게 되면 시어머님은 꼭 양말부터 신으라고 하셨다. 일명 수족냉증으로 어렸을 때부터 장갑을 끼고 양말을 신어도 손발이 차가웠던 나였지만 그러면서도 발 답답한 건 싫어 겨울에도 집에서 양말을 잘 신지 않았다.(어렸을 때는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 연탄을 때던 집에서 살았는데 이때에는 아랫목에서 먼 윗목이나 불이 들어가지 않는 거실은 추웠다.) 이런 나로서는 어머님의 주문이 내키지 않았으나 이제 막 결혼한 때였기에 말대답하지 않는 새댁으로 분해 어머님의 말에 '괜찮아요'도 못하고 마지못해 '네'를 하며 양말을 꺼내 신었다. 외풍이 있는 시골집이었지만 집은 개량을 한 터라 보일러를 틀면 바닥은 따뜻했고 집안에는 온기가 돌아 외풍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윗목 아랫목이 확연히 구분 지어지는 외풍 센 우리나라의 가옥형태에서 한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에게는 겨울 아침 양말 신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 일과의 첫 시작이셨던 것이다. 남편 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겨울에는 아랫목 이불 밖으로 나오면 냉기가 도는 시골집이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양말을 꼭 신어야 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겨울에 시댁에 가면 어머님의 아침 양말 챙기기는 계속되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겨울 양말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집에서 양말을 챙겨 신고 있다. 안 그래도 추위를 무척 타는데 작년 겨울부터는 집안에서도 종종걸음으로 다닐 만큼 추위를 더 많이 타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두한족열이라 하였으니 이 말을 실천코자 반백살 만에 털덧신을 장만했다. 양털을 가장한 꼬불이털이 들어있는 덧신 세 켤레를 사서 신고는 올해 다시 개시를 했다. 동남향인 우리 집은 겨울에는 오후 3시가 되면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서서히 햇빛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몸이 그 시간을 기가 막히게 감지해 낸다. 이때에는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올해 전기담요도 판다는 걸 알고 장만했다) 얼른 몸에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앉아서 전기담요 아래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털덧신을 보고 있으면 어렸을 때 꼈었던 벙어리장갑 같아 웃음이 나온다. 올 겨울엔 알록달록한 덧신도 장만해야지.

작년에 세 켤레 샀는데 한 켤레는 어디로 간 걸까?


또 하나의 나만의 월동 준비템은 목수건이다. 이것도 작년부터 꼭 챙기는 품목이다. 추운 겨울 집 밖에서야 당연히 목도리, 머플러, 아니면 우아 떠는 스커프를 해야 하지만 집 안에서는 무조건 목수건이다. 모양, 무늬, 색깔, 예쁜 거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무조건 손수건만 한 크기의 면 목수건이면 된다. 아이 어릴 때 날씨가 추워지면 목에 둘러 주었던 그런 작은 손수건이나 작은 스카프를 이제는 내가 한다. 쁘띠 스카프라고 이름을 붙여야 좀 폼이 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냥 목수건이다. 이걸로도 부족할 땐 긴 얇은 머플러로 칭칭 동여매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은 언제나 목수건이다. 아이 낳고는 겨울에도 목에 뭘 두르는 걸 못했다. 잘 입고 다녔던 겨울철 목티를 입으면 목을 조이는 느낌이 들어 두꺼운 외투를 입어도 목은 언제나 휑하게 드러내놓고 다녔다. 덥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겨울엔 목이 따뜻해야 한다며 강조했었는데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목에다 무언가를 두른다. 진짜 '목이 시려워 꽁'이다.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 춥지도 않은 날씨에 중년의 아줌마가 매회 목수건을 두르고 나왔었는데 당시는 그게 그리 촌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인물 컨셉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 때면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수건은 봄, 가을에 더더욱 필수템이다. 간절기 날씨에 내 몸의 보온을 책임져 주기에 꽤 좋은 놈이다. 왜 중년의 나이가 되면 목수건을 하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겠는 나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게 조금씩 서글퍼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다양한 무늬와 색깔, 재질의 목수건을 구비해야겠다. 앞으로 여름 말고는 가느다랗고 반짝이는 금속줄이 아닌 넓고 투박한 색색깔의 천이 내 목을 감싸고 있을 것 같은 애처로운 예감이 든다. 예전에는 쇼핑몰에 가서도 스카프 근처에는 눈도 안 돌렸었는데 지금은 어떤 예쁜 놈을 데리고 올까 눈알을 굴리고 있으니 말이다.

봄, 가을에 하는 목수건이고, 겨울엔 여러 번 두를 수 있는 긴 것을 한다.


이밖에 겨울철 집 안이 아닌 밖에 나갈 때면 꼭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발목이 긴 양말이다. 여름에는 맨발이거나 발목 아래 복숭아뼈까지 오는 양말을 신는 반면 봄, 가을, 겨울에는 발목을 반정도 감싸는 길이의 반양말을 신었었다. 그런데 이젠 하나가 더 필요해졌다. 언제부턴가 겨울철 차 안에서도 앉아 있으면 발목이 그렇게 시릴 수가 없었다. 뭔가 조치가 필요해서 찾아낸 것이 발목 긴 양말이었다. 목 긴 양말은 추운 날 그 진가를 발휘하는데 신었을 때와 안 신었을 때 밖에서 느끼는 추위의 정도가 달랐다. 목도 따뜻해야 하지만 발목도 따뜻해야 함을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발목을 감싸는 따뜻한 양말의 감촉은 을씨년스럽고 건조한 겨울 모습을 추억 속 한 장면처럼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구세군 냄비 앞에서 가방 속 어딘가 있을 현금을 마침내 찾아내 기쁜 마음으로 넣을 때에도, 연말 도심 속 트리 전구 장식으로 예쁘게 치장하고 있는 백화점 앞 나무들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에도,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약속시간에 늦을까 봐 조바심 내며 신호등 앞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릴 때에도, 집 근처 서점에서 아이가 사달라고 노래를 부른 만화책 몇 권을 사들고 오다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 붕어빵 굽는 냄새에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서 있는 중에도 목 긴 양말은 위력을 드러내며 추위 반 낭만 반을 섞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치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느낌이랄까. 겨울에 신는 반 타이즈나 반 스타킹과는 분명 느낌이 달랐다. 다리를 조이지 않으면서도 포근히 감싸주는 도톰한 목 긴 양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깊은 따뜻함이 있었다. 요새는 발목 긴 양말 찾기가 힘들다. 이것도 유행을 타는 건지 발견하는 순간 '심봤다'를 외치고 얼른 장바구니에 넣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올해 마련하려는 월동 준비템은 모자다. 방한은 기본에 모양도 빠지지 않는 내 얼굴형을 살려 주는 모자를 찾고 있다. 겨울바람에 돌아다니다 보면 머리가 띵해지곤 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더 심해지고 있다. 막상 사려고 하면 마땅한 모자도 없고 굳이 모자를 챙겨야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모자 없이는 겨울을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패션을 위해 쓰는 모자가 아닌 방한용 모자라니 이것 또한 슬프다.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에 내 몸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느라 도통 하늘의 명을 알 수가 없다. 언제쯤 알 수 있을까. 미혹( 迷惑: 마음이 흐려지도록 무엇에 홀림) 되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의 나이에도 마음과 귀가 팔랑였는데 '지천명'인 나이에도 하늘의 뜻은 당최 모르올시오다. 내가 그리 생각 없이 살지는 않았는데 명을 받들기에 아직 한없이 부족한가 보다. 하늘의 명(뜻)이 몇 개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라도 알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 본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늘의 명이 아닐까 하는 그럴싸한 논리를 펴 보고 싶어 진다. '그것을 알고 겸손해져서 내 몸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 그래야 정신도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뜻일 거라는 내 나름의 논리로 오늘부터 하늘의 뜻대로 내 몸이 보내는 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겠다는 결론까지 도출해 낸다. 나는 소중하니까.

그나저나 올해 지나면서는 어떤 월동준비템을 필요로 하게 될까. 겨울 살림살이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는데 이번 생의 겨울에는 이미 글렀다. 글쓰기만이 살 길이라는 가훈을 운동만이 살 길이라고 바꾸면 가능해지려나. 목을 위해 어서 따끈한 귤차나 마셔야겠다.

이미지 출처:pixabay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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