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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Nov 20. 2024

정신 차려보니 10월이더라

비로소 길었던 여름이 지나갔음을 느끼게 해 준 10월이었다. 하늘이 이렇게 파랗고 높고 예뻤었나.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쳐다보는 내 마음까지 말개지는 것 같았다. 내 삶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시간은, 계절은 그렇게 지나고 있다는 걸 하늘을 보고 느꼈다. 오랫동안 더웠던 날씨 탓에 10월 단풍의 맛도 느끼지 못하고 나무들은 그냥저냥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대충 울긋불긋한 모양새만 보여줘서 가을의 묘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하늘만큼은 이런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아주 충분했다. 적어도 내 감성은 이랬다.


그렇다면 나의 이성은? 정신 차려보니 10월이었다. 6, 7, 8, 9월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시간 난 뭘 했는지 돌아본다면 아주 지극히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아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내 할 일에 충실했다. 상대방이 그건 아니라고 해도 난 적극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시간들은 나를 잊고 산 계절이었다.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때라 그래야만 나를 좀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 같으면 이런 시간들이 나를 희생한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올 상반기 '갱년기'라는 기약 없는 시즌제 드라마 다섯 편을 바쁘게 찍었더니 조금은 안정된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아무렇지 않은 듯 똑같은 일상을 살아내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삶에 있어서는 나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남편 손에 이끌려 조금씩 하는 걷기 운동이야 그렇다 쳐도 자체 파업한 글쓰기는 재개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쓰겠다고 마음먹은 게 언제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파업은 길었다. 글쓰기를 안 한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더 그랬다. 내가 좋아서, 나를 찾아보겠다고 시작한 글쓰기다. 글을 쓴다고 금방 나를 찾을 수 있을까마는 시작할 때는 정말 간절했다. 하지만 꾸준함이 없는데 무슨 수로 나를 찾는다 말인가. 공부든 운동이든 글쓰기든 심지어 제 때 영양제 챙겨 먹는 것조차 꾸준함은 모든 일의 첫걸음이자 기본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기나긴 여름 더위로 머릿속의 움직임도 더뎌졌고 그와 더불어 지구력 제로인 내 몸을 핑계로 앞으로 나가기가 겁이 났었던 것 같다. 생각하기가, 그 생각을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게 귀찮았고 힘들었고 두려웠다. 생각한다고 글을 쓴다고 내가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닐 텐데, 바싹 말라 푸석푸석해진 내 마음과 머리에서 새롭고 멋있고 대단한 게 나올 것도 아닌데, 지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인데 굳이 힘들게 글쓰기까지 해야 할까. 게다가 주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길게 끌고 갈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때그때 해야 할 일에 치여 뒷전일 때가 많았고 그러다 보면 또 미루고 있었다. '그래,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자'라며 귀소본능이 찾아왔다. 하지 않는 이유를 대며 그러나 뭔지 모를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다른 것들에 취미를 붙이며 잠시 딴짓을 하기도 했다. 꼭 해야 하는 숙제가 있는데 하기 싫은 아이처럼 그 마음을 없애 보려고 다른 재미거리를 찾으러 다녔다. 책상 앞을 서성거리면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외면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10월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날씨 탓도 있었겠지만 내게 글쓰기는 결국 해야 할 숙제였기에. 어쩌면 뭐라도 끄적이고 싶은 게 진짜 귀소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그러더라. 끈만 놓지 않으면 된다고. 힘이 되는 말인지 굴레가 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걸음마 시작하는 마음으로, 매일 하루에 다섯 줄 쓰기를 시작으로 꾸준히 기본기를 다져볼까 한다. 파업을 하면 또 어떤가. 다시 하면 되지. 내가 사장이고 직원인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커멓게 타든, 아예 그냥 생쌀로 있을지라도 책상 앞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렇게 늦은 10월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11월을 맞이했다.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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