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적 아프리카 ep.10
이른 아침이었지만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사파리 투어를 떠나는 날이었다. 푼 지 채 열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짐을 꾸렸다. 다시 이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캐리어는 꽁꽁 싸매 맡겨둘 예정이었다. 그러나 짐을 싸면서도 내내 불안했다. 사파리 투어 여행사에 우리 숙소의 위치를 이메일로 보내 두긴 했지만 아직 답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급히 다시 이메일을 쓰고 그걸로도 모자라 프런트에서 전화를 빌려 여행사로 연락을 취했다. 우리 예약 담당자의 이름은 그레이스였다. 그녀는'응응~ 예약 당연히 잘 되어있지. 지금 드라이버가 가고 있어~'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임기응변인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어쨌든 누군가를 보내긴 한 것 같으니, 예정대로 출발할 수는 있겠지.
출발했다던 드라이버는 영 소식이 없었다. 예상 도착시간을 한참 넘긴 탓에 불안감에 발을 동동 굴러가며 그레이스에게 전화를 몇 번이고 걸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차가 막혀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지금 막 집을 나서며 '나 거의 다 와가는데 차가 막혀서!'라고 얘기하는 내 모습이 겹쳐지는 건 착각일까.
찰리라는 이름의 드라이버는 예정된 시각을 한 시간이나 넘겨 도착했다. 그래, 뭐. 도착했으니까 됐지.
서울에선 나 스스로를 그다지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아프리카에 온 이후로 무척이나 마음이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여행자는 종종 자의, 그리고 타의로 스스로의 허용범위를 넓힌다.
어쨌거나 차를 타고 거리로 나가자마자 그가 한 시간씩 늦은 이유를 이해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면주차는 기본인 좁은 왕복 이차선 도로에 수용인원의 두배쯤 되는 사람을 실은 버스, 거대한 트럭, 그리고 어디에선가 중고로 수입해 온 것이 분명한 승합차에 라디오 볼륨을 최대치로 높여 자체 스테레오 시스템을 만든 청년들까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찰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 속 같은 아수라장을 헤치고 어딘가에서 여행사의 사장을 태운 뒤, 다시 큰 마트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남은 투어 비용을 지불할 겸-1/3은 예약 시에 한국에서 외국환 송금으로 처리했다-2박 3일간의 간식거리들을 사야 한다는 것이었다.
투어는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카드로 잔금을 지불할 예정이었지만 현금만 받는다기에 어쩔 수 없이 ATM에서 인출을 해야만 했고, 간식거리도 우리가 직접 우리 돈으로 장을 봐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에서 사파리 투어는 먹을 것을 포함한 일체의 비용이 포함된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지만, 배고픈 건 결국 우리가 될 테니 잠자코 장을 볼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끝내고 사장은 사무실로 돌아갔고, 우리는 드디어 도심을 벗어났다. 유쾌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작되기는 했으니 문제 삼지 말자.
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첫 번째 투어 장소인 만야라 호수 국립공원(Lake Manyara National Park)으로 가는 동안 긴장이 풀리기 시작해선지 깜빡깜빡 졸음이 몰려왔다.
간간히 눈을 떠서 쳐다본 끝없는 도로변에는 물동이를 인 사람들이 지나가거나, 염소 떼가 지나가거나 했다.
때로는 장이 열린 모습도 보였다. 이정표도 없는 어느 즈음에서 어떻게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일까? '해가 중천에 뜰 즈음에 거-기 중간쯤에서 만나'라는 약속이라도 하는 걸까.
KARIBU. 스와힐리어로 환영한다는 인사말이 나붙은 만야라 호수 국립공원에 드디어 도착했다.
찰리는 무언가 수속을 하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서류를 주렁주렁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손쉽게 랜드크루저의 뚜껑을 열었다. 출발이다.
내비게이션은커녕 변변한 지도 하나 없었지만, 찰리는 신기하게도 다 안다는 듯이 운전했다. 고르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에 차는 물론이거니와 그 안에 실린 우리 위아래로 덜컹였다.(덕분에 한 걸음도 걷지 않았지만 건강 앱은 우리가 몇 만 걸음을 걸었다고 인식해버렸다.)
랜드크루저는 비포장 도로뿐만 아니라 얕은 물가 정도는 가볍게 지나갈 수 있었다. 국내의 모 테마파크에서도 수륙양용차를 타보았지만, 아무래도 진짜 사파리에서 타는 쪽이 훨씬 더 스릴 있었다. 바로 옆에 보호색으로 몸을 감춘 날렵하게 생긴 도마뱀이 지나가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동물을 발견하면 찰리는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급격한 고요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원숭이 가족이 풀을 밟는 작은 소리까지 들려왔다.
만야라 호수 국립공원은 원숭이로 유명하기 때문에 후에도 크고 작은 원숭이를 많이 볼 수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잠깐 동안 새끼 원숭이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가장 큰 교감의 순간이었다.
채 자라지 못한 털에 덮인 작디작은 생명체가 까만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을 때, 너도 나도 그저 숨을 쉬는 동등한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갑자기 찰리의 무전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가이드들은 '최신 동물 출몰 정보'를 서로 무전으로 주고받곤 했다.) 찰리가 몇 가지를 확인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어 어디론가 내달렸다.
도착한 곳에는 느릿느릿 풀을 뜯는 코끼리 두 마리가 있었다. 무전만으로 도대체 이 넓은 국립공원에서 어떻게 길을 찾는지에 대해 놀라워할 틈도 없이 차는 멈췄고, 이내 시동이 꺼지자 사방이 고요에 잠겼다.
코끼리는 어딘가 우아한 구석이 있었다. 앞뒤로 긴 코를 휘적이는 곡선이 그랬고, 귀찮은 듯 펄럭이는 귀가 그랬다.
기본적으로 천성이 급한 나까지 같이 차분하고 느릿느릿해졌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이 느린 만큼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우리를 포함한 세 대의 랜드크루저만이 운 좋게 코끼리를 코 앞에서 볼 수 있었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가끔 정적을 깰 뿐이었다.
한참을 풀을 뜯던 코끼리들이 방향을 돌려 수풀 너머로 사라지자, 다들 방금 꿈에서 깬 사람들처럼 활기를 되찾았다. 세 랜드크루저는 부웅 소리를 내며 일제히 시동을 걸었다.
가이드들끼리 짧게 웃으며 환담을 나누는 동안 관광객들도 머쓱한 눈인사를 나눴다. Good luck.
색의 조화가 예쁜 작은 새부터 키가 나보다도 더 클 것 같은 독수리까지, 동물도감을 펼쳐놓고 싶을 정도로 많은 새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찰리는 아주 작은 새 한 마리 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동물을 발견하면 이야기해 달라고 했었지만, 늘 동물을 먼저 발견하는 건 찰리였다.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를 조금 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 찰리가 차를 세웠다.(아무 곳에서나 내리면 야생동물로 인해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다.) 하마가 출몰한다는 곳이란다.
우리가 다리를 펴는 동안에도 하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아무리 기다려도 하마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룩말 한 마리가 그런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왠지 민망해진 우리는 '미안 미안, 비켜줄게!'라고 인사(?)하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초식 동물들은 참 신기했다. 서로 다른 종인 데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한가로이 함께 풀을 뜯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여 나는 조금은 부러워졌다. 우리 인간은 말이지, 같은 종인 데도 그렇지가 않단다.
유달리 겁이 많았던 흑멧돼지-우리에겐 '티몬과 품바'의 '품바'로 잘 알려져 있다-들은 가족을 챙겨 엉덩이를 씰룩이며 떠났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만 같아 비죽이 웃음이 나왔다.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기린을 드디어 만났을 때는 기쁜 나머지 김남편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기린은 약간은 엇박자가 아닌가 싶게 겅중대며 걸어갔다. 아마도 먹음직한 나무를 찾아 헤매는 것이겠지.
저녁밥을 먹을 즈음에 방송하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 단골손님이던 임팔라들을 보자 귓가에 '우-와-우와-우-와-' 하는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열심히 퀴즈를 맞추던 그때나 지금이나 녀석들은 한결같았다. 밥을 먹다 말고 내가 생각한 정답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밥알을 우물거리며 티비 앞으로 뛰어가던 소녀는 어느새 유부녀가 되었는데 말이다.
누떼들은 가끔 차 앞을 막고 길을 터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잠깐 기다리다 클락션을 울려도 슬쩍 눈길만 줄 뿐 피하지 않는 몇 마리가 있었다. 우린 '이거 교통 체증이네!' 하며 킥킥 웃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 투어의 최대 단점인 억지 쇼핑을 당했지만, 또 그 와중에 마음에 드는 천을 발견하긴 했다. 흔히 사파리 투어를 할 때 꼭 봐야 한다는 'Big 5' 동물이 그려진 천이었다.
가격만 물어보고 나가려고 하니 흥정을 해주긴 했지만 꽤 비쌌다. 나중에 시내 어딘가에서 비슷한 천을 보았지만 혹시 마음이 아플까 봐 일부러 가격은 보지 않았다.
2박 3일을 보낼 롯지에 도착했더니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도 며칠 전에 결혼식을 치렀었다. 신혼여행치고는 다소 빡빡한 일정 탓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얼른 체크인을 하고 모래먼지를 얼른 털어내고 쉬고 싶었는데 자꾸 로비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하는 것이 이상했다. 찰리에게 따져 물으니 여행사에서 롯지로 예약 비용을 입금하지 않아서 예약이 취소된 상태라고 했다. 그럼 왜 입금을 안했냐고 했더니 자기네도 그레이스로부터 돈을 못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우리가 그동안 연락을 취했던 그레이스는 말하자면 여행대행사였고, 찰리의 여행사는 그레이스의 회사와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송금한 1/3의 투어 비용은 그레이스의 회사가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이 금액 중 일부를 찰리의 회사로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단이 발생했다는 거였다.
오전에 만났던 찰리네 사장은 그러니 1박만 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파리 투어를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날아 이곳까지 찾아온 우리였다.
다행히 1/3의 투어 비용을 보냈던 외국환 송금 영수증을 챙겨 왔기 때문에 그걸 들이밀며 우리는 모든 돈을 다 지불했으니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내 큰소리가 통한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찰리네 회사에서 돈을 지불해서 겨우 롯지를 배정받았다. 찰리는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다 잘될 거라는 의미의 스와힐리어였다.
말만 들으면 안심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장해야 할 순간이 바로 이 하쿠나 마타타를 들었을 때라고 읽은 기억이 번뜩 났다.
그러나 우리는 몹시 배고프고 피곤했고, 더 따질 방법이 없기도 했으니 일말의 찝찝함과 찰리의 미소를 뒤로 하고 방으로 얌전히 들어갔다.
못내 신경 쓰이던 하쿠나 마타타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는 동안 잊혀 갔다. 어쩌면 마음속에서 울리던 경고를 애써 무시하려는 무의식적 보호본능이었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