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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토 Jul 21. 2016

너의 세계

소시민적 아프리카 ep.03


 차 안에 물을 놔뒀다면 아마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흥에 못 이겨 들썩대던 그 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차의 소음, 이를테면 에어컨이 작은 바람을 내는 소리나 방향지시등이 가끔 깜빡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오직 침묵만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작고 귀여운 녀석들이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맞잡은 손, 너의 세계




 항상 여행을 준비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객관적 정보만 얻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타인의 감정과 감상이 나에게로 옮겨와 내 것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실제로 여행지에 갔을 때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지양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볼더스 비치를 검색할 때마다 펭귄의 사진이 예고 없이 튀어나오곤 했다.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사실 펭귄이라면 아쿠아리움이나 동물원에서도 본 적이 있는 데다가 사진도 이만큼이나 봐버렸으니 이 먼 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손을 마주 잡고 하염없이 내다보는 녀석들을 보자마자 내 걱정들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마치 처음으로 살아있는 펭귄을 본 것만 같았다. 끼룩끼룩. 갈매기와 비슷한 펭귄의 목소리는 바다 건너에서 들리는 것처럼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아. 너희들 새였지.


 꼼짝 않고 먼 곳을 지켜보는 녀석들은 마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뭘 보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든 생명체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펭귄, 너의 세계는 어떠니? 한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세계니?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작고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펭귄이 뭐가 그리 무서운지 아이는 아빠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하긴 나도 나보다 몸집이 수천 배는 작은 벌레를 보고 엉엉 울어대곤 했으니 펭귄 정도면 거대한 축에 속하는 것일지도.)

 엄마 혹은 아빠로 가득 찬 아이의 세계를 넓혀주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나도 언젠가 이해할 날이 올까.





방망이 깎던 펭귄





 어스름이 내린 후의 볼더스 비치는 고요했다. 이곳의 주인인 펭귄과 뒤늦게 찾아온 몇 안 되는 관광객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낮에 다녀갔을 것이다. 겨우 고요한 해변을 되찾았는데 지각한 인간이 괴롭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녀석들은 어쩌면 이렇게까지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각자의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정말 느릿느릿하고 그만큼 신중했다. 그래서 어쩐지 장인 같아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공을 들여 찬찬히 방망이를 깎는 노인처럼.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게...


 무슨 일을 하든 집중해야지.



 다 똑같이 생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다 다르다. 조금 더 통통한 녀석, 눈이 더 옆으로 찢어진 녀석, 꼬리가 긴 녀석 짧은 녀석. 세상에 똑같은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펭귄은 분명 수영을 잘 한다고 들었는데, 물 위를 떠다니는 모습이 어째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해상구조대가 있다면 구하러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수영이 아니라 한낱 떠다님이었다.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쓸려나갔다가 육지에 발이 닿으면 원래 올라오려 했다는 듯 엉덩이를 씰룩이며 자연스럽게 걸어나왔다.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을 테지만, 존재만으로 사랑받으며 마음껏 헤엄치고 까무룩 잠에 들었다 깨는 삶이 이다지도 부럽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치이며 성장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일까.





리더의 중요성




 날이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위험하니까. 아쉽지만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저 멀리 수상한 한 무리의 펭귄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대여섯 마리의 불량 펭귄들.



 놓칠 수 없는 구경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후다닥 뛰어갔다.


편집 과정에서 화질이 망가졌지만, 만화 캐릭터처럼 움직이는 녀석들을 감상할 수 있으니 꼭 재생해 보시길!


 어쩌다 길을 잃고 이곳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와도 너무 왔다.

 아무도 길을 모르는 눈치(?)였는데 맨 앞의 한 마리가 발을 떼니 뒤따르는 펭귄들이 우르르 따라 몰려간다. 앞의 펭귄은 점점 더 앞으로 나간다. 뒤의 펭귄은 점점 더 따라간다. 이런 악순환을 거쳐 결국 식당 주변까지 흘러온 것이다. 당연히 원래의 목적지인 바다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니 인간사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길을 잘 모르는 리더와 그를 맹목적으로 좇는 팔로워들. 일단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절대 후진하지 않는다.

 이건 펭귄들이니 귀엽다고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펭귄에게서 얻어도 되는지 의문인 오묘한 깨달음을 안고 깜깜한 도로를 달렸다.

 원효대사는 해골물에서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니 펭귄에게서도 깨달음은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방금 본 진귀한 구경을 조잘조잘 떠들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싸웠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이렇게 별일 아닌 것을. 이렇게 잊힐 것을.


 불빛은 아직도 멀리 있었다. 차 하나 없는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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