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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토 Jul 29. 2016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소시민적 아프리카 ep.04


 결혼식이 끝나고 처음으로 취한 제대로 된 수면이었다. 그다지 푹신한 침대는 아니었지만 등이 땅에 닿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행복의 최대치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지치면 안 돼.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엑스트라 발전기를 꺼내자




갓 내린 따뜻한 커피는 아프리카의 맛 그 자체였다.


 겨우 눈을 떴다. 피로가 엄습해왔다.


 여행은 사실 꽤나 피곤한 것이다. 그 준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그러하다.


 직장인의 여행 준비란 대개 퇴근 후에 시작된다. 이미 장시간을 모니터의 백색광에 시달린 후라 전자기기라고는 꼴도 보기 싫은데도 인터넷을 뒤져가며 각종 정보를 모아 루트를 짜고 예약을 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되도록 해두고 떠나야 하므로 야근도 일쑤이다.

 그렇게 어깨에 곰 두어 마리 얹은 채로 떠나도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회사 전화를 무시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고, 내가 없는 동안 고생했을 동료들에게 선물할 작은 뇌물도 골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서도 나는 떠난다. 살기 위해서 떠난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흔히 여행을 일상의 쉼표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어쩌다 한 번 찍는 쉼표가 아닌 인생의 교각을 세우는 행위에 가깝다. 대체로 깜깜하고 안개가 잔뜩 껴있는 강을 건너기 위해 짓는 다리의 교각. 언젠가 내가 서 있는 바닥이 희미해질 때 돌아보며, 이 다리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위해서.


 그러니 지치면 안 된다.

 커피를 마시자. 카페인이 내 안의 엑스트라 발전기를 가동할 연료가 될 테니까.





 카페인에 의지해 테이블 마운틴으로 향했다. 편평한 윗부분 때문에 테이블 마운틴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산은 무려 해발 1,086미터로, 높이 때문인지 구름이 지나가지 못하고 걸려있는 자주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 모습은 '테이블보를 덮었다'는 귀여운 표현으로 불리는데 우리가 방문한 날은 어쩐 일인지 테이블보가 걷혀 있었다.



 아침이었는데도 벌써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걸었다. 테이블 마운틴 꼭대기까지 향하는 케이블카를 타려면 줄을 서야 할지도 몰랐다.






산신령에게 물어봐





 케이블카 티켓을 살 수 있는 사무실 근처는 많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많은 관광객이 이용하는 빠알간 시티투어 버스도 정차해 있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얼른 줄 서서 얼른 티켓을 사야지!



 분위기로 봐서는 분명 이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섰어야 할 것 같은데 사람들이 다 주변만 맴돌았다. 뭔가 이상했다.

 티켓 오피스로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게 되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테이블 마운틴이 테이블보를 덮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구름을 넘겨버릴 만큼 바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차량이 진입하는 입구에 "Closed"라고 적힌 전광판을 얼핏 본 기억이 그제야 났다.

 연두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언제쯤 다시 운행할까요?

 직원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날씨에 달렸죠.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그도 산신령은 아닌 것을.



 생각해보면 여행은 행운이 필요한 일의 연속이다. 정확히 내가 방문한 그 날짜와 그 시간에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일이란 기본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티켓 오피스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간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러면 산신령님이 기도를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참으로 무심하시지. 바람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전날 거하게 싸우고 깨달은 바가 있던 김남편과 나는 일찌감치 케이블카 탑승을 포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나와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라도 올라가 볼걸 그랬다.(사실 나는 등산을 무척 싫어하므로 일찍 일어났더라도 실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 보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온 사람들이 씩씩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 정상에 산다는 바위너구리를 못 보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을 청하는 모습이 마치 이 산의 주인 같아 보일 정도라고 하는데.



 이게 웬 횡재야. 바위너구리 발견.



 그리고 포획.

 ... 은 당연히 거짓말이고, 김남편이 근처 기념품 샵에서 바위너구리 인형을 하나 사주었다. 실물과 똑같을 거라고 믿으며-실제로도 사진과 꽤 비슷하다-소중히 끌어안고 테이블 마운틴을 뒤로해야만 했다.


 남아공을 떠나는 날이었다.









 워터프론트에서 점심을 먹으며 와인을 한 잔 한 덕에-남아공은 와이너리가 유명하다-나는 조금 고주망태가 되었다. 비록 아쉬운 일이 남았어도 흥겨웠으면 됐다. 언젠가 또 이 곳을 찾아 못했던 일들을 이루고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비행으로 점철된 여행이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세 번째 비행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짐바브웨였다. 물론 직항이 있을 턱이 없으므로, 나미비아에서 갈아타야 한다. 그것마저도 시간이 여의치 않아 공항 노숙을 해야만 한다. 하드코어 신혼여행이다.

 바위너구리 녀석까지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나자 비행기는 서서히 활주를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떠난 여행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여러모로 심사가 복잡한 일이다. 모든 일은 뒤돌아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답기도, 아쉽기도 하기 때문에.

 이국의 산과 바다를 기억하며 마음속에 교각을 하나 더 세웠다. 언제라도 이 기억을 꺼내볼 땐 남반구의 바람이 부는 기분이겠지.



 내리는 사람도 몇 없는 소박한 비행이었다. 우리를 태운 작은 비행기는 금방 나미비아의 호세아 쿠타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보자마자 에게게, 저게 국제공항이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작은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씻을 곳도 마땅찮을 것 같고. 쉴 곳이 있기나 할까?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조금 많이 더 심각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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