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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토 Aug 03. 2016

그날 밤, 공항에서 생긴 일

소시민적 아프리카 ep.05


 환승과 몇 없는 비행 스케줄로 인해 나미비아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숙소를 예약한 것이었다. 저녁 7시에 내려 다음날 아침 9시에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적어도 공항 근처의 숙소에서 다리 뻗고 잠은 자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나미비아는 비자가 필요한 국가였다는 것이었다.

 비자 발급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한국의 대행사를 통한 발급과, 남아공과 같은 주변국에 위치한 나미비아 영사관을 통한 발급이었다. 첫 번째는 너무 비쌌고, 두 번째는 남아공 체류 일정이 짧아 불가능했다. 별 수 없이 공항 노숙을 하기로 했다.


 작은 공항에 내렸을 때만 해도 그 어떤 불길한 예감도 들지 않았다. 실은 처음 해보는 공항 노숙이 기대되기까지 했으니까.






농담도 잘하셔라




 Transfer를 찾아 들어가려고 했는데 열린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줄을 서라고 직원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줄을 섰다.

 얼마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다. 환승하려고 한다는 내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표정이 하나도 없는 직원이 나를 흘긋 보더니 쾅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어라, 환승에도 도장이 필요했던가...?


 어쨌든 이제 공항 노숙 시작이다. 여권을 받아 씩씩하게 나가려는 찰나, 직원이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이내 주변으로 직원 세네 명이 몰려들었다. 옆을 보니 김남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억센 억양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자기네들끼리 무언가 열띤 토론을 하다 우리 쪽을 흘긋, 또 흘긋 쳐다보니 제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방금 찍은 도장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내 여권을 다시 낚아챈 직원은 무자비하게도 볼펜으로 도장을 죽죽 그어버렸다.



 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떠났다.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짐짝처럼 구석에 찌그러져 있을 뿐이었다. 괜히 손톱을 물어뜯고 싶어 졌다. 잘근잘근.


 학생 같아 보이기도 하고, 직원 같아 보이기도 하는-이 대륙 사람들은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한 남자가 다가와 우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횡설수설하며 참으로 구질구질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요, 내일 아침에 여기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요, 그러니까 환승을 하고요, 그래서 밤새 여기 있으려고 한 건데요, 중얼중얼.


 그는 살짝 웃더니 신혼여행이냐고 물었다. 네네. 신혼여행이(이 모양이)에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그는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는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몸집이 커다란 여자가 책상에 서류를 잔뜩 쌓아둔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최종 보스다...!

 밖에 우리를 두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여차저차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심기가 불편한 건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꽉 닫힌 유리문을 뚫고 나온 여자의 화난 목소리는 우리 귀를 파고들었다. 내 두려움이 반영된 것이었을까, 여자의 몸집은 사무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 보였다. 사고 회로는 진작 작동을 멈추었다. 사실 생각을 쥐어짜 본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도 했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얼마를 서 있었을까. 억겁의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대화를 마친 그가 사무실을 나와 우리에게 이야기가 잘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아, 이 사람은 천사인가.


- 이야기가 잘 되었어요. Departure Area 에 내일 아침까지 계셔도 됩니다. 여권은 저희 직원에게 맡겨 주세요. 아침에 티켓을 발권해서 같이 돌려드릴게요.

- 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하하하. 괜찮습니다. 다만, Departure Area를 벗어나진 마세요. 저-기 보이는 저 경찰이 당신을 쏠 거니까요. 하하.


 농담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농담이라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저 멀리 무시무시한 눈으로 우리를 째려보고 있는 경찰이 보였다. 더 정확히는 경찰의 허리춤에 꽂힌 총이 보였다. 침을 꿀꺽 삼켰다.





무수한 따봉 속에서




 극도의 피로감과 함께 정상적인 사고가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작은 공항에는 Transfer 할 수 있는 구역이 따로 없다. 그러니 무조건 입국을 하고 출국을 해야 한다. 우리는 비자가 없으니 입국을 못한다.


 하아아. 깨달음과 동시에 머리를 싸맸다. 어쩜 이렇게 무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변명거리는 있었다. 워낙에 정보가 없는 곳으로의 여행이라는 점이 일 번, 결혼 준비로 바빠 신혼여행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점이 이 번.


 자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작은 공항의 불이 하나 둘 씩 꺼지기 시작했다. 달달거리는 셔터를 내린 사람들은 우리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더니 빠른 속도로 떠나가 버렸다. 각오했던 공항 노숙이었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뒤에 사람 있어요


 아쉬운 대로 의자를 이어 붙였다. 혹시나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경찰의 주의라도 끌까 봐 조마조마했다. 심지어는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무서웠다. 내가 탈출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공항의 야간 근무자들은 이따금씩 교대를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향해 따봉을 날렸다. 따봉. 따따봉.

 교대할 때마다, 교대하는 모든 직원이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주었다. 혹시 이 나라에는 엄지 손가락을 드는 행위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지만 함박웃음을 짓는 그들의 표정을 보아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는 것 같았다.

 무수한 따봉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휴대폰 속에 담긴 열 몇 곡의 소중한 음악을 밤새도록 재생했다. 가사는 물론이거니와 이 가수가 어느 부분에서 숨을 쉬는지, 반주가 몇 초 지속되는지까지 외울 정도가 되어서야 새벽이 밝아왔다.





하드코어 인생아





 새벽 여섯 시가 지나자 슬슬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른 사람이라도 있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제야 우리가 몹시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미비아 공항에 내리기 전에 먹었던 기내식 이후로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얼른 탑승 수속을 시작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시간이 더욱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공항 직원이 인수인계를 안 해서 우리의 존재를 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뒤로하고, 역시나 아무 표정이 없는 직원이 귀신같이 우리를 찾아와 여권을 돌려주었다. 여권 사이에는 고이 인쇄된 티켓도 들어 있었다.

 직원들만이 이용하는 이상한 통로를 통해 나온 우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탑승 수속을 마쳤다. 드디어. 드디어 떠난다.



 비행기에 탑승하니 이번엔 한 시라도 빨리 이 비행기의 바퀴가 바닥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우락부락한 직원이 우리 머리채를 잡고 비행기에서 끌어내리지 못하도록, 얼른 이륙해 주었으면.


 아무래도 나는 온갖 나쁜 경우의 수를 상상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이런 순간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범함을 가졌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아니, 애당초 이런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까.


 모험심 가득한 여행자로 살고 싶어 하지만,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왔지만, 실제의 나는 큰 소리만 나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겁쟁이였다.


 하드코어가 되기엔 너무나 겁쟁이인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서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다 나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불안의 밤을 지나 드디어 짐바브웨가 가까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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