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음악, 베토벤
요새 가장 많이 듣는 음악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웅장하면서도 환희로운 선율과, 서정적인 흐름, 재기발랄한 현의 진동이 풍성하게 펼쳐지는 곡이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일을 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훌륭한 은유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교향곡은 대기업의 여러 부서들이 대표이사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선율을 만들어 내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다. 현악 사중주는 4명의 현악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합을 맞추는 소규모 스타트업과 같다. 소나타는 혼자서 펼쳐내는 1인 사업자 같은 느낌이다. 협주곡은 조금 특이하다. 한 악기가 주인공이 되어 홀로 좌중을 주도하는 가운데, 오케스트라가 보조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은 지휘자가 통제하지만, 지휘자도 주인공 연주자의 흐름을 존중하며 호흡을 맞춘다. 협업하는 회사의 느낌도 있고, 꽤나 이미지 큰 스타 임직원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의 현장 같기도 하다. 아티스트와 보조를 맞추어 매출을 만들어내는 엔터업의 느낌이 보이기도 하다. 명백히 음악을 책임지는 지휘자와, 관심을 독차지하는 연주자의 존재, 즉 두개의 태양이 있는 것 같은 이 미묘한 관계 속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서사가 협주곡만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 협주곡에 처음 빠지게 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더 콘서트(Le Concerto)란 영화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에 반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협주곡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위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끌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당한 지휘자가 역시 숙청당한 동료 바이올리니스트의 딸이 탈출에 성공해 유명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협주하기로 한 것을 발견하고, 이미 음악을 놓은지 오래인 과거의 단원들을 모아서 몰래 콘서트를 열고자 하며 발생하는 좌충우돌을 그린 영화다. 위트와 풍자, 감동이 가득한 명작이기도 하다. 그렇게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접하고, 특히 이차크 펄만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한 버전을 즐기다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알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단연 나의 최애 아티스트이다. 보통 인지도가 가장 높은 클래식 아티스트는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정도일 것 같다. 바흐는 그 수학적으로 정교한 선율들로 하여금 걸림 없는 음악이 장점이기도 하고 그만큼 많은 원리를 정립하여 클래식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천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정신이 홀릴 것 같은 아름답고 재기발랄한 음악을 왕성하게 만들어 냈다. 베토벤의 음악은 종교적 느낌이 강한 바흐의 음악이나, 완벽한 재능을 타고난 모차르트의 것과는 차별화되게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깊게 배어 있다. 그 자체도 고된 삶의 궤적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결국에는 그럼에도 결국 인간이라는 궁극적 인류애와 사람에 대한 희망이 짙게 깔려있다. 무엇이 그런 희망을 보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희망은 언제나 음악에 환희로움으로 연출된다. 이 클라이맥스는 그의 마지막 9번 교향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악기들이 돌아가면서 같은 선율을 선보이다가 합쳐지며, 꽤나 멋들어지게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악가가 일어나 “이 소리가 아니다, 더 즐겁고 환희로운 노래를 부르자”며 합창의 파트로 넘어간다. 그리고는 성악가들의 목소리,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모두 어우러져, “모든 인간은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형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마치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은 인간임을 은유하는 듯하다. 이 압도적인 인류애로 인해, 이 교향곡은 연말 콘서트 단골 셋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살아가다 보면 나를 포함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떨어지는 많은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베토벤의 선율은 그런 인류애를 충전시켜준다. 여러 일들로 착잡한 밤, 방안을 메우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주고받는 선율은 이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것들을 해낼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듯하다. 이렇게 음악은 삶과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힘을 가졌다.
Itzhak Perlman – Beethoven: Violin Concerto (with Daniel Barenboim, Berliner Philharmoni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