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집단의 모순
인간의 조건에 관한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찮게 하게된 대화인지라 현명하고 조리있게 생각을 이야기하진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이던 가운데, 한 번쯤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인간의 조건을 건조하고 피상적으로 본다면, 생물학적 종의 계보와 경계를 따르면 될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고민하고 토의한 이 주제는 그리 단순한 이야기를 향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어쩌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존재와 차별화되어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포인트를 밝히고자 하는 것에 가깝고, 차라리 그 진의는 존엄성의 조건이라고 치환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배제한 합리주의의 시각에서만 입각하여 볼 때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명할 길을 찾기는 어렵다. 존엄한 인간이란 마치 천동설과 같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개념에 불과하고, 실상은 광대한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 중 아주아주 희미한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지금껏 인식할 수 있었던) 생명체의 차원에서 볼 때도, 더 고도화된 인식과 사고를 할 수 있을 뿐 생존을 향해 발버둥친다는 큰 목적에서 차별점이나 숭고한 어떤 것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존엄하다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개념 속에서 정의된 지극히 인공의 것이라 자연에서 증명할 수 없고, 그래서 존엄과 이에 따라 인간이 누리는 인권 등의 근원을 파고들다보면 결국 신을 요청할 수밖에 없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 신의 존재 역시 증명하기 전에는 확률적으로 존재함을 가정해야 하기에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는 명제를 진리로 두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것과 그 조건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지향을 발견하는 것으로 파악해야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사회적 합의 혹은 본능적인 영역들을 밝혀 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생물학적 인간이지만, 사회적 인간이 아님을 선언할 때, 즉, “사람도 아니다!”라고 일갈할 경우의 대부분은 케이스를 살펴볼 때, 개별의 사람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 준수해야 할 기초적인 규율들을 어기는 이에게 그렇게 선언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기초적인 규율은 평화, 역지사지, 신뢰와 같은 것으로 사회계약론의 초반부 자연법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사회적인 집단을 추구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더욱 연장시켜보면, 그 곳에는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생존과 종의 유지라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 허나 그 존재하고자 하는 동기를 오래 유지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고, 그래서 협동이 강제될 수밖에 없다. ‘외로움’이라는 근본적인 감정은 인간에게 각인된 협력에 관한 경보기일 것이다.
하지만, 개미들도 존재하기 위하여 협력하는데, 이 협력만으로 인간의 대단함을 자찬하기에는 머쓱함이 있다. 진정 재미있는 부분은 인간은 개별성과 협력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이다. 협력은 타인에 맞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개별자의 특성을 제약하는 성격을 가진다. 즉, 개인으로 개성을 강력히 추구할 수록 갈등 면적이 많아지면서 협력 가능성이 줄어드는 이 모순적인 동기들을 인간은 모두 추구하려 한다. 한 개별자가 규범과 문화를 배척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규범이 개개인의 개별성을 완전 말살하여 생존에 최적화된 사회 형태(전체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하는 모습은 인간 역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존재는 ‘자연스럽게’ 상호 모순적인 것들 중 일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과한 욕심을 부리는 셈이다. 어쩌면 이 욕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영달을 추구하면서 다른 이를 존중해야 하는 이 공생의 원리는 우리가 부품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적절한 수준에 대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을 만들어내었고 그 안에서 우리가 위대하게 생각한 많은 것들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