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익어가기 위해.
파김치를 담았다. 1인가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통은 대량 생산을 하지는 않지만 무슨 자신감인지 쪽파 두단을 구매해 겨울 나기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담았다. 김치를 담는다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다. 이렇게나 귀찮은 음식이 대체 어떻게 설계되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김장은 또한 상당히 노동 집약적인 과정이다. 쪽파가 뿌리내린 흙의 흔적이 여전한 밑단을 다듬고, 전체적으로 씻어내는 작업만해도 족히 한시간은 걸린다. 그러고 나서 양념 재료를 섞어 만들어 파에 발라준다. 이렇듯 한가닥 한가닥을 만져줘야 하는 정성에 비해 이후 먹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고 신속하다보니 억울한 감이 있지만 그런 즐거움을 위해 이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포인트도 있다. 이 과정이 낭만이고자 한다면, 김장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분업화되어야 한다. 혼자서 1시간동안 할 파 다듬기는 여럿이서 할 때 산술적으로 간편해진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서로간의 대화로 채워지며 고됨은 낮아지고, 체감되는 시간은 빨라진다. 그리고 함께 기여한 이 음식이 비로소 밥상에 올라가고 파의 수분이 양념과 입 안에서 터져나갈때 낭만은 도래한다.
아쉬운 것은 이 낭만이 현대 시대에는 오롯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랜 역사가 지나며, 소실된 여유와 배려는 이 김장이라는 과정을 특정 구성원들에게만 종속시켰고, 즐겁고 효율적이어야 할 과정은 고되고 소모적인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갈등을 낳으며 가족 공동체를 훼손시켜 왔다. 결혼을 앞둔 동료에게 절대 김장할 줄 안다고 예비 시댁에 말하지 말라는 회사동료의 당부를 보며,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김장은 비비고의 몫이 되어, 각 집안마다의 다양성 있는 파김치는 사라지고, 비비고의 레시피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자연스럽지만 아쉬움이 남는 시대이다.
이렇게 만들어 낸 파김치를 2~3끼 정도 먹을 양으로 소분하여 본가로 챙겨가 가족들에게 실험삼아(?) 맛보게 했는데, 첫 끼에서 모두 완판될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즐겁게 먹는 가족들을 보니 신기한 형태의 뿌듯함과 즐거움이 느껴졌다. 음식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영역에서, 나의 창조물이 가까운 이들의 입에 들어가고, 즐거움을 주며, 그의 양분이 된다는 모든 과정은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가치 창출이면서, 나의 “쓸모”에 대한 확인인 듯했다. 마치 회사에서 좋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치하를 받는 느낌과 유사하다. 어린 내가 어머니의 파김치를 즐겨 먹을 때,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미소는 수년의 세월을 건너 마침내 내게 계승되었다. 그 순간은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과 공감의 시간이었다.
피김치는 담은 직후부터 먹을 수 있는 김치이다. 처음 생김치로 먹을 때에는 파의 매콤한 날것의 맛과 양념의 맛이 서로 경쟁적으로 풍미를 뽐낸다. 이 때의 매콤함은 강렬하게 코를 찌르며 존재감을 강조한다. 그러다가 점점 익어가면서, 양념과 파는 서로를 받아들이며 익숙해진다. 이 모든 과정은 살아감과도 유사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강렬하게 메시지를 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흘러가며, 세상의 많은 이유들을 받아들여가며, 손쉽게 날카로운 말을 휘두르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더 조화로운 방향을 고민하게 되는 등 “익은 김치”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릴 때, 어른들이 이야기하던 성숙함과 숙성됨의 과정이 이것이었을까? “파김치가 된다”는 관용어구처럼 담아둔 파김치들은 어느새 그들의 매운 물을 빼내며, 축 늘어져 숙성되어 간다. 나는 생김치일 때를 가장 좋아하지만서도, 한편으로는 이 모든 변화하는 과정들에서 그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풍미와 개성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익은 파김치가 되어가는” 것이 딱히 슬프거나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가진 풍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