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이 삶을 반추하며 건네는 따뜻한 위로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감동을 만들어내는 콘텐츠를 추구했다. 말초적 자극이 대세가 된 콘텐츠 시장에서도, 그 상업적 필요로 인해 충실하면서도 그 길에서 감동을 만들 기회들을 항상 바래 왔다. 그것이 콘텐츠의 하이엔드라고 생각했고, 결국에는 도달해야 할 지점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감동은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간접 경험을 토대로 한 사람이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관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음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 변화로 하여금 더 나은 어떤 것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감동이 있는 콘텐츠이다. 어느 시대에나 말초적인 스낵 콘텐츠는 무수하였겠지만, 결국 시간을 넘어 살아남는 명작들은 이 감동을 크고 작게 다양한 방향으로 가진 콘텐츠이다.
애니메이션의 강국인 일본의 작품들 속에서도 하야오의 작품은 그 결이 독특하다. 메시지나 연출 감동의 결이 일반적인 작품에 비해 독보적이고, 그 여운도 강렬하다. 그 안에서는 잔잔한 치유가 깔려 있다. 이것이 여러 실력 좋은 애니메이션과 거장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한 듯하다.
세상과 내 안의 악의에 대한 긍정.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를 보고, 하야오 특유의 작품성의 원천을 엿본 기분이었다. 그것은 결함과 부정의 존재를 인식하고, 긍정하는 가운데 현실로 나아가는 따스함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는 나 자신에게도 생채기를 새긴다. 보통은 그것을 부정하면서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거나, 내면의 안식처로 도피하곤 한다. 적대와 도피, 그것은 부정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 결함들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가운데 더 나은 현실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은 긍정의 결과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결과는 같을지라도 그 안의 내러티브의 차이는 감동의 유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긍정은 필연적으로 인류애, 나아가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전제한다. 마치 파괴적이게 되어도 이해할법한 베토벤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장 숭고하고 따뜻한 인류애를 노래한 것처럼. 하야오가 오타쿠 문화를 비판한 것도 일맥상통하다. 부정마저 긍정하는 대긍정. 그 온건함이 답답할지라도 위로가 되는 것은 아마도 많은 대중들이 한켠에서는 그 온기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형태를 띈 하야오의 자서전과도 같았다. 거장에게 상업성의 제약을 해제하고 맘껏 하고싶은 것을 하게 한 터라, 그 안의 수많은 상징들과 은유들로 가득 채워, 대중성 없는 난해함이 비판 요소가 되긴 하지만서도, 이 정도 거장에게 이제는 그게 중요할까 싶기도 하다. 그간의 작품은 최대한 많은 대중에게 건네는 메시지이지만, 이 작품은 느낄 수 있는 자에게, 혹은 각자의 관객이 느끼는 만큼만 가져가라는 형태였고, 충분히 울림이 있는 작품이었다. 정보는 축복이면서도 비극이다. 너무 커져버린 세계관에서 비교의 저주속에 항상 결핍을 인식하게 되고, 매일매일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는 시대 속에서, 하야오는 그가 겪어온 내적 성장의 길을 은유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