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우 Oct 04. 2024

어린아이와 같이

 예술은 언어를 넘어선 초감각적 소통 수단이다. 논리와 과학이 온전히 밝혀내기 어려운 복합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전달해낸다. 그것은 명료한 메시지의 형태를 띄기도 하지만, 어떠한 추상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에 공명하여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감동’이다.


 감동은 이성적이고 논증가능한 방식으로 전달되기는 쉽지 않다. 그럴때 예술은 언제나 인간의 역사속에서 함께 나아가며 그 미션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한 사람이 일생을 거쳐서 추구해온 이상의 영역에 있는 아름다움. 그러기 위해서 감내해온 세월과 그 속에 켜켜히 서린 희노애락들. 그리고 마침내 온갖 정성을 다해 표현해 내는 것들. 이것을 단순한 언어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전달하는 언어는 예술의 칭호를 얻곤 한다.


 계기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심하게 올리선 엄지 끝에서부터였다. 한 나이든 피아니스트가 담담한 선율을 연주하고, 미동도 없이 그 연주에 몰입하는 관객들,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 노 관객의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 이 시대에 익히 찾아보기 어려운 조악한 화질이 표현해내는 그 모든 분위기와 서정적인 음악속에서 나 역시 그 관객과 같이 가만히 그 연주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뭉클한 무언가, “감동”을 느꼈다.


 그 감동은 연주에 대한 설명을 보며 더 진해졌다. 소년 시절 망명한 피아니스트는 여든을 넘은 나이에 극적으로 조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 연주는 그 실황이었다. 그리고 이 곡은 작곡가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작곡한 곡으로, 꿈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어린시절 떠나온 고향에 돌아와 연주한 이 2분 남짓의 곡으로 수백마디의 말을 넘어서는 마음을 전달한다.


 어린이와 노장. 이 극적인 대비. 성경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것이라 한다. 세상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긴 삶의 끝과 완성은 수미 쌍관될진대, 그것은 결국 어린이의 마음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세상에 나와 살아가며 관념을 형성하고 자타의 구분을 공고히 한다. 그 구분 속에서 미움과 고통이 생긴다. 사랑에의 열망은 이 구분을 초월하여 온전히 이해받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어쩌면 본디 구분이 없던 것에 대한 회귀에의 열망일지도 모른다. 이 자타의 원초적인 구분이 만들어내는 상을 극복하는 것은 종교적, 문화적인 모티브이기도 하다.


 쌓여진 관념을 초월한 어린아이와 같은 극단의 순수. 그러면서도 육신의 생리적 제약을 초월한 상태.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생에서 설정해야할 혹은 설정된 목적지 혹은 체크포인트일 수 있다. 아퀴나스 성인이 말한, 신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상을 통해서가 아닌 신의 빛 자체를 추구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리적 욕구를 초월한다는 말이라던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오온이 공함을 깨닫고 진아를 마주한 열반이라던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노장이 삶을 반추하며 노래한 어린아이에 관한 연주에서 받은 나의 감동은 이런 생각들을 끌어올린다. 그게 노장이 의도한 바일지는 모른다. 어쨌든 예술은 창작자의 의도만큼이나 수용자가 자신의 삶과 생각에 비추어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일상속의 사소한 짜증이, 그런 나의 옹졸함이 문득 부끄러워지는 연주였다.


(관련: https://youtu.be/HBz1EvMAOEM)

작가의 이전글 행복에 관한 메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