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일 차
부르게테~일라라스/우르다니스(≈21.6km)
알람은 맞추지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섯 시 반에 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다른 세 분은 깊은 꿈나라에들 계셨다. 소란이 방해라도 될까, 모든 짐을 한 아름 다 안고선 일단은 복도 밖으로 나왔다. 어정쩡한 자세로 침낭을 개고 잡다한 충전기 등을 챙겼다. 세수를 한 뒤 배낭의 매무새까지 모두 마무리했다. 옷은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늘 그랬듯, 전날 샤워를 한 뒤 갈아입은 옷은 잠옷이자 다음날 걷기 복장이었다. 스트레칭을 정성스레 해주었다. 새벽의 어둠에 잠긴 창밖엔 둥그런 내 모습만이 둥둥 떠있었다.
슬슬 아침이 깨어나는 분위기가 숙소 전반에 피었다. 조용하나 은밀히 떠들썩하다. 미리 사둔 인스턴트식품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따뜻한 차까지 한 잔을 하니 그래도 정신이 좀 차려진다. 이미 당장 출발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어쩐지 아침의 이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할 일도 없이 미적거렸다. 바쁜 사람들을 구경하다, 겨우 여덟 시쯤에야 출발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피레네도 넘었겠다 이제 동키 서비스는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부터 배낭의 무게는 다시 온전히 내 몫이 된다.
부르게테(Burguete) 마을 위로 분홍빛 하늘이 스몄다. 아직 어둑한 아침이나, 걷기엔 충분한 빛이 있었다. 개운할 만큼 아름다웠다. 잠시 붙잡아 두고 싶을 만큼 선명하고 아늑했다. 가만히 머문 듯 보여도 시시각각 쉼없이 변해갔다. 걷는 자들을 그저 따라 걸었다. 그만큼 시작의 길 위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골목을 곧 빠져나간다. 개울을 건너 흙길을 걸었다. 소 목장 너머로 안개가 뭉쳤다 흩어졌다. 사방의 하늘은 물감처럼 서서히 번져갔다. 분홍은 주홍이 되었다, 노랑으로 변주했다. 정수리 위로 걸쳐있던 밤의 어둠은 잠시 잊은 사이 어느새 자락을 완전히 감추었다. 그 많던 순례자들은 모두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훌쩍 사라져 갔다. 걷는 속도를 좀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나면 이미 저만치다. 마치 나 혼자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긴 뭐 어때, 차분해진 길이 오히려 평온하다.
이내 숲길로 들었다. 길진 않아도 꽤 가파른 오르막이 있었다. 어디선가 개울 소리도 울렸다. 잊을만하면 선명한 새소리도 들려왔다. 청명한 마음으로 상기되는 이 길만의 기분이랄 게 있었다. 날씨도 한몫했다. 약간의 비 예보가 있었는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8시 50분, 첫 번째 마을 Espinal을 지났다. 곧 말 목장 사잇길을 올랐다. 춥진 않았지만, 입김이 났다. 이곳은 아직까지 반팔 반바지차림으로도 괜찮았다. 확실히 영국보다 남쪽으로 내려온 게 맞았다. 상쾌할 정도로 딱 좋은 아침의 온도였다.
성당의 종소리가 천천히 따라왔다. 경쟁하듯 걷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길은 오롯이 고요에 잠겼다. 들판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내리막길, 지금 이 순간이 딱 마음에 들었다.
숲길이 끝나자 돌판으로 잘 다듬어진 길이 나왔다. 곧 두 번째 마을 Viscarret-Guerendiain을 만났다. 10시였다. 마을을 지나서 다시 숲이다. 숲 속에 작은 돌탑이 보여 조심조심 돌 하나를 꼭대기에 올려다 놓았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합장을 하고 "잘 걷겠습니다." 인사를 드렸다. 잊을만하면 삐끼삐끼삐끼 새소리.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동차 바퀴의 소음도 시끄럽게 들려왔다. 한 번씩 도로를 거치며 숲으로 들길 반복했다. 그렇게 30분 남짓, 금방 세 번째 마을 Lintzoain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났다. 인사를 건넸더니 통통통 달려와 만져달라고 다리 사이를 비빈다. 포근한 감동에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얼음 땡. 따뜻한 온기에 마음이 그만 사르르 녹았다. 사정없이 궁디 톡톡톡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놀았다. 애교 넘치는 냥이 덕에 오늘 길의 보상은 이걸로 다됐다.
마을 지나 오르막, 돌길 산길 여기서 땀이 좀 났다. 다들 어디서 나타난 건지 갑자기 다시 순례자들이 많아졌다. 얕은 산을 넘어 다음 마을로 간다. 동양인들은 유독 새벽 일찍부터 걷는다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아직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숲길이 길게 이어졌다. 한껏 많아졌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길은 다시 조용해졌다.
11시 40분, 적절한 타이밍에 푸드트럭을 만났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다. 콜라를 한 캔 사 마셨다. 생장표 쿠키와 함께 점심의 허기를 해결했다. 딱 20분만 쉬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시작을 동행했던 대만분과 같은 숙소에 묵었던 한국분을 우연히 번갈아 만났다. 인사와 대화, 그리고 헤어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만큼 쉬었으면 충분했다.
내리막의 부서진 바위들이 멋들어졌다. 특별한 풍경은 없었지만 그리 힘든 길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려 짜잔, 수비리(Zubiri) 마을을 만났다. 12시 50분이었다. 근사한 다리와 오래된 건물들이 이름하야 ‘다리의 마을(Pueblo del puente)’다웠다. 아르가(Arga) 강이 그 밑을 낙낙히 흘렀다. 고요히 순례자들을 기다리는, 인구 400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었다.
정해진 바는 없지만,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가 보편적인 프랑스길 2일 차 구간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한 마을을 더 가기로 했다. 출발지점이 론세스바예스 다음 마을이기도 했지만, 이왕이면 순례자들이 적은 마을에 머물고 싶었던 게 컸다. 숙소도 미리 예약해 두었다. 부러 다음 마을 일라라스(Ilárraz) 근방으로 잡았다. 그쯤에서 길을 빠져 우르다니스(Urdániz)라는 마을로 조금만 더 가면 됐다. 이제 3km쯤 남았다.
부엔까미노(Buen Camino)!
빨래를 널던 수비리의 주민이 어디서 왔냐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덩달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연히 만난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표정을 보였다. 어쩐지 품이 여유로워졌다. 마을과 숲을 거쳐 광물 공장 지대를 지나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도로길을 올라 어설픈 수풀을 건넜다. 수비리 다음 마을 일라라스는 오르막에 위치한 작은 동네였다. 그 마을을 지나서도 순레길을 조금 더 이어갔다.
곧 갈림길을 만났다. 오후 1시 45분, 이제 순례길과는 잠시 헤어질 시간이다. 그대로 길을 내려 우르다니스 마을로 향했다. 도로를 건너 그 아기자기한 마을로 들어섰다. 초입에 있어 숙소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반 가정집에 마련된 사설 알베르게였다. 2시 숙소 체크인, 제일 먼저 도착했다. 열심히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숙소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시는 주인장. 그 유쾌함이 마음에 들었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작은 수영장까지 있어 여유를 즐기기에 딱 좋았다. 햇살이 진해 빨래는 눈 깜짝할 새 말랐다. 곧 도착한 미국인 삼부자와는 이런저런 대화를 두서없이 나눴다. 한국 음식을 자주 해 먹는다는 미국 청년. 김밥, 김치찌개, 감자전에, 냉면까지! 요리한 사진을 보여주며 그 실력을 뽐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국인인 나보다 낫다고 쌍따봉을 날렸다. 별 것 아닌 이야기에도 다 같이 한바탕씩 웃는다.
병맥주로 쨍- 건배! 맑은 하늘 아래, 수영장은 더없이 파랬다. 마음이 한껏 시원하고 풍요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고양이의 날인 가보다. 나른한 녀석이 잔디 위에 누워있었다. 물어보니 이름이 오링이란다. 굼뜬 표정과 달리 나름 도도해 도무지 품을 주지 않는다. 숙소엔 서양 어르신들로만 가득했다. 원했던 대로 소수의 순례자였고, 나름대로 조용했다. 미리 주문한 저녁 식사는 가정식 느낌으로 차려졌다. 곁들여진 레드와인도 두 잔이나 맛 좋게 마셨다. 오늘의 마무리는 맥주 대신 홍차로 했다.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말 그대로 꽉꽉 찼다. 바짝 마른 빨래는 진즉에 다 거뒀다. 하늘이 닫히자 캄캄이 어둠이 내렸다. 풍덩. 몇몇 분들은 밤 중에도 수영을 즐기셨다.
내일은 팜플로나(Pamplona)까지다. 걸어야 할 길이가 17km쯤 된다. 부담되지 않은 거리라 마음이 여유로웠다. 음... 근데 언제부터 17km 정도가 짧은 거리로 여겨지게 된 건지. 거참, 기가 찰 노릇이다. 길을 마주하는 그 변화가 신기했다. 그만큼 경험이 무서운 법이었다. 웃기지도 않지. 그새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이러고 있다. 풉풉.
늦은 밤이 되자, 오링이 먼저 다가와 품을 슬쩍 줬다. 손인사도 하고 궁디 팡팡도 실컷 했다. 이제야 졸졸 따라오는 품이 꽤 귀엽다. 덕분에 오늘은 한국에 있을 반려묘 호야와 모무의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 9시에 잠자리에 누웠다. 달콤한 꿈을 기대했지만, 그리 피곤치 않았던 건지 오늘따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2024.10.01.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일 차(누적거리 49.36 km)
오늘 하루 36,438보(22.6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a」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10월 29일 오늘 3주기를 맞은 이태원 참사를 추모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길 바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